계룡사(鷄龍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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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충청남도 공주시계룡산에 있는 절.

개설

신라하대 화엄십찰로 꼽힐 만큼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이었으나, 조선전기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은 확인되는 바가 없다. 세종대 선종 18사로 공인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변천과 특징

(1) 조선시대 이전의 계룡사

계룡사의 설립 연혁에 대해서는 분명히 전하는 것이 없다. 대개 갑사(甲寺) 혹은 계룡갑사(鷄龍岬寺)로도 부른다[『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 공주목]. 420년(신라 눌지왕 4) 아도(阿道) 창건설, 566년(신라 진흥왕 17) 혜명(惠明) 창건설, 혜명 중창설 등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상(義湘)의 전교십찰(傳敎十刹) 중 하나로 계룡갑사를 언급하고 있어, 신라하대의 대표적인 화엄사찰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고려시대 계룡사의 정황에 대해서도 확인되는 바가 없다.

(2) 조선시대의 계룡사

1424년(세종 6) 7개의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각각 18사씩 모두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할 당시 계룡사는 선종 사찰로 공인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는 신라하대 화엄종 사찰이던 계룡사가 이후 어느 시기엔가 선종 사찰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종대에 선종 18사 중 하나로 공인된 계룡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전지는 100결이었는데 50결을 더해 주었으며, 절에서 지낼 수 있는 승려는 70명이었다.

1583년(선조 16) 정문루(正門樓)를 중수했고, 이듬해에는 대종(大鐘)을 만들었다. 종의 명문에는, 이 해에 북방 오랑캐의 전란이 일어나 충청·경상·전라 하삼도 사찰의 그릇과 쇠붙이를 모두 나라에 바쳐 병기와 화포를 주조하도록 하였기에 절의 종이 없어졌는데, 사람들이 절이란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장수를 기도하는 곳이라 하여 8,000근의 새 종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 명문에는 ‘계룡산(鷄龍山) 갑사사(岬士寺)’라고 되어 있어, 갑사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탔으므로 전쟁이 끝나고 대웅전 등을 중건했고, 효종, 영조, 정조, 고종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사찰을 중수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현전하는 유물 중 중요 문화재로는 갑사철당간과 당간지주(보물 제256호), 갑사부도(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등이 있고, 1569년(선조 2) 조성된 월인석보(月印釋譜) 목판(보물 제582호)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가 전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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