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위(開原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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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요동 지역 방어와 이민족 통제를 위하여 요동 북부 개원에 설치한 위(衛).

개설

여진과 몽골 등 이민족과 인접한 접경 지역에 위치하여 명나라 때 요동 북부 지역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성이었다. 25개의 성보를 직접 관할하였으며, 이곳에서 마시(馬市)가 열려 변방 민족과 한족의 교역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군사상 요충이었으므로 누르하치가 명을 정벌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점령하고자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명나라 초기 개원은 명과 북원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명나라는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점차 요동 북부의 중진으로 개원을 변화시켜 나갔다. 1388년(홍무 21) 알타리(斡朵里: 현 길림성 훈춘 부근)에 설치하려던 삼만위를 개원성으로 옮겼는데 이로부터 개원성을 삼만위성(三萬衛城)이라고도 불렀다.

1393년(홍무 26)에는 우가장(牛家庄: 현 요령성 해성시 서북의 우장(牛庄))의 요해위(遼海衛)를 개원성으로 옮겨왔다. 이로써 개원성은 요동도지휘사사의 25개 위(衛)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동 북부의 관문이 되었다. 명대에 위(衛)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아래의 군사 조직으로 1위(衛)는 5,600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러나 요동과 같은 변경의 경우 인구의 부족으로 그 수를 채우지 못하여 위의 숫자는 각 위(衛)마다 일정하지 않았다.

개원성은 당시 요동 북부를 방어하는 성이었으므로 개원 주위의 25개 성보를 직접 관할하였다. 중고성(中固城)·철령성(鐵嶺城)·범하성(凡河城)·의로성(懿路城)·진북보(鎭北堡)·청양보(淸陽堡)·진이보(鎭夷堡)·영녕보(永寧堡)·고성보(古城堡)·경운보(慶雲堡)·정원보(定遠堡)·단가장와보(段家庄窩堡)·진서보(鎭西堡)·증서보(曾遲堡)·송가박보(宋家泊堡)·정가박보(丁家泊堡)·신성보(新城堡)·위원보(威遠堡)·정안보(靖安堡)·송산보(宋山堡) 등 모두 25개 성보를 책임지며 개원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서 들어오는 몽골과 여진족들을 방어하고 있었다.

개원성은 특히 변방의 여진과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 삼관에 마시(馬市)를 개설하여 한족과 이민족들의 경제 교류에 중요한 장이 되기도 하였다. 여진인들은 면포나 농구·그릇 등의 생활용품을 사들였으며 한족들은 여진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삼과 모피 등 내지에서 생산량이 적은 고가의 물품들을 사들였다. 개원마시(開原馬市)는 영락 연간 개설된 이래 가장 번성한 마시가 되었다. 당시 여진인들은 백두산과 송화강 등 요동의 자연이 만들어 내는 산삼과 모피 등을 풍요롭게 채취하여 이들을 한족과 교역하며 그들의 경제적 발전과 생존을 도모하였다. 이 때문에 명과 여진, 몽골 등이 만나는 개원 지역에는 가장 중요한 마시가 형성될 수 있었다.

개원마시에는 광순관(廣順關, 곧 남관시(南關市)라고도 하며 합달하(哈達河) 상류에 위치), 진북관(鎭北關, 북관시(北關市)라고도 함), 그리고 신안관(新安關)의 삼관(三關)이 있었다. 그중 남관시는 해서여진(海西女眞)에 해당하는 오랍(烏拉)·합달(哈達)·휘발(輝發) 등과 주로 시장을 열고 교역하였다. 진북관(鎭北關, 북관시)은 개원 동북쪽에 위치하여 여진의 엽혁부(葉赫府, 곧 예허부)와 교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신안관은 복여위(福餘衛) 등의 몽골과의 교역을 진행하였다. 마시의 개설 이후 만력 초기 개원진 북관에만 하루에 480여 명의 여진인이 이르기도 하였다.

개원은 요동 북부에 위치한 사통팔달의 지역이었으나 물산이 풍부한 장백산·두만강·우수리강 등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서 그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던 해서 여진에 해당하는 오랍·휘발 등의 여진 부족들이 개원과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 흥기 이후 개원은 여진족이 요동을 점거하기 위하여 먼저 점령해야 할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요동도사의 거점인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점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배후 지역인 개원을 포함한 요동 북부 지역을 먼저 선점할 필요가 있었다. 개원에는 삼만위·요해위·안락주(安樂州)·자재주(自在州) 등 명 초기에 설치된 수많은 성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유사시 북부 몽골이 공격이 있을시 남쪽의 철령위(鐵嶺衛)와 심양위(瀋陽衛)에서 군사를 지원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누르하치의 주공격 대상 지역이기도 하였다. 누르하치는 개원을 공격하기 전 정보전을 이용해 내부 사정을 탐색하면서 1620년을 전후하여 개원 점령에 마침내 성공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개원은 요동의 북부에 위치하였지만 수많은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을 정도로 요하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개원은 요하로 흘러드는 지류가 근처에 위치하여 육로보다 요하를 이용하는 수로를 통하여 군수품들이 공급되었다. 개원의 노동만(老東灣: 현 장구자(丈溝子))은 가장 많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 당시 요동도사의 중심이던 요양(遼陽)과 요하(遼河)로 연결되어 있던 개원은 청하(淸河)를 이용해 요동의 물자가 공급되기에 충분한 지리적인 조건을 갖춘 요충지였다. 특히 개원에서 조선 후문으로 연결되는 개원동육로(開原東陸路)는 조선의 후문과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개원동육로는 개원에서 길림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로, 이 길을 통하여 여진과 조선으로의 경제적 교류가 진행되었으며 역참로에는 방주성(坊州城)·해관(奚關)·납단부성(納丹府城)·비이홀(費爾忽)·불출(弗出)·남경(南京)·수주현(隋州縣)·해양(海洋)·독로(禿魯)·산삼(散三) 등이 있었다. 개원에서 동쪽으로 송화강을 지나면 도문강(圖們江)·훈춘(琿瑃)·연길(延吉)을 지나 곧장 조선의 후문에 해당하는 북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원에서 서쪽으로는 강평(康平)·창무(彰武)·부신(阜新)·교하(蛟河)·돈화(敦化)·동녕(東寧)··통료(通遼)로 통할 수 있었다. 개원 북로는 창도(昌圖)·이수(梨樹)·농안(農安)·조주(肇州)를 지나 해서 여진 지역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개원은 사통팔달로 통하는 요동 북부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직 및 역할

1392년(홍무 25) 5월 주원장은 주송(朱松)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개원성(開元城)을 지키도록 하고 삼만위와 요해위 그리고 자재주(自在州)와 안락주(安樂州) 등의 치소(治所)를 개원성에 둠으로써 여진과 몽골인을 끌어들여 위소(衛所)에 편입시키고 효율적으로 요동 북부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1405년(영락 3) 명나라의 정책에 따라 개원에 마시가 개설된 이후 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개원의 대외적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개원에는 각각 남관(南關: 현 광순관(廣順關))·북관(北關: 현 진북관(鎭北關))·서관(西關: 현 신안관(新安關)) 등 삼관삼시(三關三市)가 열려 해서(海西)·건주(建州)·모련(毛憐) 등의 여진부(女眞部)와 몽골을 대상으로 호시(互市)를 열었다.

개원은 지리적으로 3면이 모두 이민족과 접하고 있어 ‘삼시(三市)’가 개설되어 있었다. 첫째는 서관에 해당하는 청하관(淸河關: 현 신안관(新安關))으로 올량합(兀良哈) 3위(衛)와 주로 교류하였다. 둘째는 광순관, 셋째는 진북관으로 주로 건주(建州)·해서(海西)·야인(野人) 등의 여진족과 교류하였다. 이처럼 4관(關) 중 3관(關)이 개원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원이 마시가 설치된 요서의 광녕(廣寧)보다도 더 많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명대의 개원성은 몽골과 여진을 견제하는 요동 북부의 중요한 성이었다. 그러나 명 후기로 갈수록 위소병의 도망과 이탈 등으로 요동의 군사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개원의 관리들이 부패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말 공급이 어려워지는 형국이 되었다. 개원의 방어력이 약화된 것을 알게 된 누르하치는 1619년(천명 4) 개원을 급습하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후금의 팔기군은 개원성을 포위하였다. 후금군은 개원성에서 명나라 군사의 강력한 저항을 만나지만 결국 개원성을 지키던 마림(馬林)·우화룡(于化龍)·고정(高貞)·우수지(于守志) 등의 장수와 수만의 병사, 그리고 일반 평민들은 후금군에게 참살당하고 후금은 개원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원성이 후금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개원 남쪽의 철령(鐵嶺)과 심양(瀋陽) 등 명나라의 중요한 도시들은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 조발이 예정된 지역 중 하나였으며(『선조실록』 25년 12월 22일)(『선조실록』 26년 2월 16일), 1619년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심하지역(深河之役)) 당시에도 주요한 접전 지역으로서 조선의 정보에 자주 등장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2월 19일)(『광해군일기』 11년 1월 20일)(『광해군일기』 11년 7월 1일). 후일 효종이 청의 볼모가 되었을 때 이곳을 거쳐 간 일이 있었다[『효종실록』 부록 효종 대왕 묘지문].

참고문헌

  • 『遼東志』, 遼海出版社.
  • 『全遼志』, 遼海出版社.
  • 張士尊, 『明代遼東邊疆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002.
  • 閻崇年, 『明亡興淸六十年』, 中華書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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