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甘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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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꽃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의 덩이뿌리.

개설

1700년대 후반 일본을 통하여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단맛을 가진 ‘마’라는 의미의 감저(甘藷)는 남방에서 도입되었다고 남저(南藷) 또는 남감저(南甘藷)로 불렸으며, 조엄(趙曮)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조저(趙藷)라고도 불렸다. 약 60년 정도 뒤에 도입된 북저(北藷)인 감자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일본말인 고귀위마(古貴爲麻)에서 나온 ‘고구마’가 되었다. 재배를 위해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이 필요했던 고구마에 비해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감자는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가 용이하여 보급이 빨랐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주성분이 탄수화물로 구황작물의 역할을 하고, 밥·떡 등에도 이용되었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중·남아메리카이나, 한국·중국·일본·인도네시아·브라질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 한반도에는 1600년대 중엽부터 조선통신사들에 의해 고구마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이다.

1763년(영조 39)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 일본에서 본 고구마에 대한 명칭, 식물의 특성, 재배법, 도입 경로, 음식으로서의 활용법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대마도(對馬島)에 들러 그 종자를 얻어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심어 보게 한 것이 한반도에서 고구마 재배 역사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당시 고구마를 조저라고도 했다.

조엄이 보낸 온 고구마를 받은 강필리(姜必履)는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전문서인 『감저보(甘藷譜)』를 편찬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의 서광계(徐光啓)가 찬술한 『농정전서(農政全書)』를 통하여 고구마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이광려(李匡呂)도 조선의 기민(饑民)을 위해 고구마를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뒤를 이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나선 실학자들에 의해 고구마 재배에 대한 연구와 노력으로 『감저종식법(甘藷種植法)』·『감저신보(甘藷新譜)』·『종저방(種藷方)』·『감저보(甘藷譜)』·『학포헌집(學圃軒集)』·『원저방(圓薯方)』·『종감저법(種甘藷法)』·『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종저보(種藷譜)』 등이 편찬되었으며, 고구마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정조대에 호남의 기근을 살피고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고구마는 상당히 희귀한 작물로(『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잘 보급되지 않아 종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전라도강진이 고구마 산지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190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전국적인 재배가 가능하였고, 남해안 지방과 섬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였다.

연원 및 용도

『종저방』, 『학포헌집』, 『감저경장설』, 『종저보』에는 고구마를 이용한 밥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마밥은 생고구마나 말린 고구마를 멥쌀에 섞어서 지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고구마가루를 보리가루나 메밀가루에 섞어 국수를 만들기도 하였다. 『시의전서(是議全書)』, 『주식시의(酒食是儀)』, 『규합총서』에 기록된 감저병(甘藷餠)은 찹쌀가루에 껍질째 만든 고구마가루를 섞어 만든 떡을 말한다. 감자의 유입 이후 찹쌀가루는 멥쌀가루로, 고구마는 감자로 재료가 바뀌었다.

『임원경제지』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구마가 들어간 감저장(甘藷醬)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마와 콩[黃豆]은 익는 정도가 다르니 따로 익혀 섞어서 메주를 만들어 간장을 담는데, 그 맛이 달고 향기롭다고 하였다. 이는 고구마와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담근 새로운 된장으로 메주 제조에 콩의 첨가량을 줄이고 다른 작물로 대체한 것이었으나 1900년대 이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
  • 『감저보(甘藷譜)』
  • 『규합총서(閨閤叢書)』
  • 『시의전서(是議全書)』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이참봉집(李參奉集)』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종저방(種藷方)』
  • 『종저보(種藷譜)』
  • 『주식시의(酒食是儀)』
  • 『학포헌집(學圃軒集)』
  • 『해사일기(海槎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