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문각(欽文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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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 내에서 고종의 어진을 보관하던 건물.

개설

1901년(광무 5) 고종은 51세를 기념해 새로운 어진을 제작했고, 이것을 흠문각에 보관했다(『고종실록』 39년 6월 21일). 1904년(광무 8)에 경운궁 화재로 흠문각이 소실되면서, 새로운 흠문각을 경운궁 서쪽 영역에 다시 지었고, 다시 이곳에 어진을 봉안하였다.

위치 및 용도

흠문각은 원래 현재 경운궁에서 정관헌(靜觀軒)덕홍전(德弘殿) 사이의 화계가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할 당시 다른 건물과 같이 소실되었고, 현 중명전(重明殿)이 위치한 경운궁 서쪽 궁궐 영역에 다시 건립되었다.

변천 및 현황

흠문각과 관련된 기록은 1901년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고종의 어진은 문화각(文華閣)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 어진들을 흠문각으로 옮기는 의식이 7월 19일에 거행되었다.

1901년에 고종은 51세가 된 것을 기념해 새롭게 어진을 조성하였다. 이전 어진과 비교해 30여 년 만에 새로운 어진을 그린 것이다. 당시의 어진 도사(圖寫)는 정관헌에서 진행되었다. 새로 만든 어진은 면복본(冕服本)이 하나, 익선관본(翼善冠本)이 둘, 군복대본(軍服大本)이 하나, 소본(小本)이 하나, 총 5본이었다. 고종은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정해 이궁을 짓고 두 개의 수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익선관본이 두 개인 것은 하나를 서경에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 역시 다섯 본의 예진(睿眞)을 제작하였다. 새로운 어진이 완성되면서 고종은 어진의 밑그림인 초본(綃本)과 1872년(고종 9)에 그린 어진을 세초(洗草)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세초를 한 뒤 남게 된 초본은 자기에 담아 궤에 넣은 다음 흠문각 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902년(광무 6) 11월 11일에는 새로 그려진 어진 중에서 면복대본(冕服大本) 1본과 익선관소본(翼善冠小本) 1본을 펼쳐서 흠문각에 봉안했다.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흠문각에 봉안된 어진과 예진도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어진이 옮겨진 곳은 준명전(濬明殿)이었다. 준명전은 경운궁에서 미국영사관을 지나 서쪽 중명전이 있는 곳에 위치했던 건물로 추정된다.

어진과 예진을 임시로 준명전에 봉안한 것이기 때문에 어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중명전 인근에 흠문각을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기존 흠문각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에는 함유재(咸有齋)를 건립하도록 했다. 흠문각은 1904년 7월 10일(음력)에 완공되었고, 7월 15일 흠문각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04년(광무 8) 새로 건설한 흠문각의 상량문은 이근명(李根命)이 작성하였다(『고종실록』 41년 7월 2일).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고종]어진도사도감의궤([高宗]御眞圖寫都監儀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