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원(輝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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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휘원 |
한글표제 | 휘원 |
한자표제 | 輝元 |
관련어 | 간양록(看羊錄), 관원[關ヶ原] 전투, 임진왜란(壬辰倭亂), 풍신수길(豊臣秀吉)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세연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법명: 천수원(天樹院) 암종서(巖宗瑞) |
성별 | 남 |
생년/일 | 1553년 2월 4일 |
몰년/일 | 1625년 6월 2일 |
출신지 | 안예국(安藝國) |
관력 | 우위문독(右衛門督), 우마두(右馬頭), 시종(侍從), 참의(參議), 권중납언(權中納言)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모리륭원(毛利隆元), 모: 미기국(尾崎局: 내등흥성(內藤興盛)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휘원(輝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
안토도산(安土桃山)~강호(江戶) 시대의 무장·대명(大名)인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
개설
조부 모리원취(毛利元就)가 벌여놓은 판도를 발판 삼아 중국(中國) 지방을 제압했으며, 이후 동진하여 사국(四國), 근기(近畿) 지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미장국(尾張國)을 발판으로 서진해 오던 직전신장(織田信長)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신장 사후에는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신종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에 출진하기도 하였다. 1600년의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되었으나, 패전하여 이후 영지가 대폭 삭감되었다. 이내 출가하였으나, 말년에 이르기까지 정치일선에서 활동하였다.
가계
모리씨의 가계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겸창막부(鎌倉幕府)의 능리였던 대강광원(大江廣元)은 넷째 아들인 대강계광(大江季光)에게 상모국(相模國) 애갑군(愛甲郡) 모리장(毛利庄)을 상속하였는데, 계광의 후손은 이 장원에 근거하여 모리씨를 칭하였다. 모리씨는 이미 겸창시대에 분가를 형성하였으며, 그중 일파가 안예국(安藝國)의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모리씨는 모리원취 시대에 이르러 굴지의 전국 대명(大名)으로 성장하였으며, 강호시대에 장주번주(長州藩主)로 번영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장주번은 살마번(薩摩藩)과 더불어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선도하는 거점이 되었다.
활동 사항
휘원은 1563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불과 11세의 나이에 모리씨의 가독직을 승계하였다. 1571년에 사망한 조부 원취 및 가신단의 보좌를 받으며 출운국(出雲國), 비전국(備前國)을 차례로 수중에 넣어 명실상부 중국 지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찬기국(讚岐國)에서 발생한 무력 분쟁에 개입하며 근기 지방 진출을 모색하였다. 이처럼 동진하던 휘원은 경도(京都)를 제압한 후 서진하며 열도 통일을 노리던 직전신장과 1576년 이후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휘원은 전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를 우대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하였지만, 신장의 부하 우시수길(羽柴秀吉) 즉 훗날의 풍신수길의 활약 속에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1582년 신장의 사후에는 일단 정국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수길이 패자로 급부상하자 이내 신종하였다. 이후 수길이 이끄는 통일전쟁에 주요 무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전공을 거듭 인정받아 1591년에 이르러서는 112만 석의 대명이 되었다. 휘원이 수길로부터 신뢰받고 있었다는 점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도망쳐 온 강사준과 여진덕의 보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임진왜란 때에는 칠번대(七番隊)로 편성되어 경상도에 머물며 구주 명호옥(名護屋)의 지휘본부와 북상하는 일본군을 연계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1592년 12월의 성주 전투에서도 엿보이듯이, 휘원 지휘하의 일본군은 종종 조선 의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정유재란 때에는 일본에 머물러 있었다. 강항은 『간양록(看羊錄)』에서 모리씨에 대해 “안예주(安藝州)의 광도(廣島)에 도읍하였는데, 물력(物力)의 웅장하고 풍부함이 왜경(倭京)에 견줄 만하며, 그 풍속은 왜의 모든 곳에 비해 약간 후한 편이다. 성질이 자못 너그럽고 완만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기질이 많이 있다고 한다.”고 하였으며, 휘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벨 때는 약간 불쌍하게 여기고 민망히 여기는 뜻을 가졌었다 한다.”며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1600년의 관원 전투에서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대판성(大坂城)에 머물렀다. 전투에서 승리한 동군의 덕천가강(德川家康)은 휘원의 죄를 물어 많은 영지를 몰수하였다. 결국 모리씨는 주방(周防)과 장문(長門) 두 주에 37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같은 해 휘원은 출가하였지만, 여전히 일족의 장로로서 정치일선에서 활약하였다. 1623년에 이르러서야 은퇴했으며, 2년 뒤 서거하였다.
묘소
산구현(山口縣) 추시(萩市) 옛 천수원(天樹院) 부지
참고문헌
- 『간양록(看羊錄)』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94.
- 신윤호, 「임진왜란기 성주전투와 일본군의 동향」, 『歷史學硏究』53집, 2014.
-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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