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방(回榜)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회방 |
한글표제 | 회방 |
한자표제 | 回榜 |
상위어 | 과거(科擧) |
관련어 | 방방의(放榜儀), 선온(宣醞), 은전(恩典), 회방연(回榜宴)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박현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회방(回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43년 1월 2일, 『정조실록』 19년 윤2월 6일 |
과거에 합격한 지 60주년이 되는 일.
개설
과거에 합격한 지 60주년이 되면, 국가에서 이를 기념하여 조화(造花), 음식물 등을 하사하고 벼슬의 등급을 높여 주었다. 양로(養老)의 뜻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내용 및 특징
회방은 당사자가 80~90대까지 장수해야만 맞이할 수 있는 귀한 영예였다. 민간에서는 일찍이 이를 기념하는 회방연(回榜宴)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1669년(현종 10) 생원진사시 회방을 맞이한 홍헌(洪憲)·이민구(李敏求)·윤정지(尹挺之)는 함께 회방연을 열고 이를 기념하는 『만력기유사마방회첩(萬曆己酉司馬榜會圖帖)』을 제작하였다. 1579년(선조 12) 문과 회방(回榜)을 맞이한 송순(宋純)의 가족들이 회방연을 열자 왕이 특별히 꽃과 선온(宣醞: 술)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 후 1716년(숙종 42) 이광적(李光迪)이 문과급제 회방을 맞이하자 숙종이 조화와 선온을 내려 회방을 축하하였다(『숙종실록』 43년 1월 2일). 이후로 국가에서 회방을 축하하는 것이 관행화되었으며, 의례의 규모도 점차 확대되었다.
영조대에는 조화와 선온의 하사에 더하여 회방인들을 왕이 친견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이어 1786년(정조 10)에는 문무과와 생원진사시 합격자로 회방을 맞이한 자에게는 가자(加資)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1794년(정조 18)에는 과거 합격증인 홍패(紅牌)나 백패(白牌)를 다시 내리도록 하였다.
특히 1795년(정조 19)에는 영의정홍낙성(洪樂性)과 능은군(綾恩君)구윤명(具允明) 등이 회방을 맞이하자 정조는 특지로 문무과와 사마시 회방의 방방의(放榜儀)를 거행하도록 하고, 합격자 명단인 방목(榜目)에도 회방 사실을 수록하게 하였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6일). 홍낙성에게는 궤장(机杖: 팔걸이와 지팡이)도 하사하였는데, 이후에는 회방을 맞이한 대신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것도 관행이 되었다.
국가에서 회방을 기념하는 의례는 이후에도 쭉 이어졌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연회비용조의 연수금(宴需金)을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920년 전 판서김병익(金炳翊)에게 50원을 하사한 것이 마지막 사례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을묘식년사마방목(乙卯式年司馬榜目)』
- 『성호전서(星湖全書)』
- 『구당집(久堂集)』
- 『면앙집(俛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