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시(洪太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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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1636년 황제위에 올랐던 홍타이지([皇太極], hungtaiji)의 한자 이름.

개설

홍태시는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시절에는 후금의 4대 버일러 가운데(중) 하나였으며, 누르하치 사후에는 한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내몽골의 차하르([察哈爾], cahar)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얻은 뒤, 만주·몽골·한인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중국의 제도를 원용하여 문관·육부를 설치하는 등 국가조직의 정비에도 힘썼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외에 홍대시(洪大時)·홍태주(洪太主)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

가계

홍태시는 누르하치의 측복진(側福晉)이자 후에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로 추봉되는 여허나라 몽고저저([葉赫那拉孟古哲哲], yehenara monggojeje) 소생으로, 누르하치의 여러 아들 중 여덟 번째였다. 홍타이지의 첫 정식 복진은 니오후루(鈕祜祿)씨였으나 1612년 사망하였고, 계복진(繼福晉)이었던 울라나라씨(烏拉那拉氏)는 1623년 누르하치의 명으로 폐출되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여러 부인을 두었는데, 1636년 내명부의 봉작제도를 마련할 당시 황후에 책봉된 코르친([科爾沁], korcin) 출신의 보르지기트 저르저르([博爾濟吉特哲哲], borjigit jerjer)를 비롯한 정실부인들은 모두 몽골 보르지기트씨 출신이었다. 2명의 대복진(大福晉)에는 황후의 조카인 보르지기트씨가 관저궁(關雎宮) 신비(宸妃), 본디 차하르 릭단([林丹], ligdan) 칸의 부인이었던 보르지기트씨가 인지궁귀비(麟趾宮貴妃)로 책봉되었으며, 2명의 측복진에는 마찬가지로 차하르 릭단 칸의 부인이었던 또 다른 보르지기트씨가 연경궁(衍慶宮) 숙비(淑妃), 그리고 관저궁 신비의 동생인 보르지기트씨가 영복궁(永福宮) 장비(莊妃)로 책봉되었다. 홍타이지는 이들 정실부인들을 비롯한 여러 비빈들에게서 총 11명의 아들과 14명의 딸을 보았는데, 이 중 장비 소생의 아홉 번째 아들 풀린([福臨], fulin)이 홍타이지의 뒤를 이었다. 그가 세조(世祖)순치제(順治帝)로, 이로 인하여 그 생모인 장비 또한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로 추봉되었다.

활동 사항

홍태시는 만주족의 초기 사료에서는 ‘네 번째 버일러([四貝勒], duici beile)’라고 지칭되기도 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셋째 아들[第三子]’이라는 호칭으로도 등장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17일).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홍타이지는 팔기(八旗, [jakun gūsa])의 수장인 8명의 호쇼이 버일러([和碩 貝勒], hošoi beile)가 되었고, 1621년에는 배다른 형들인 다이샨([代善], daišan)과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ūltai), 그리고 슈르가치([速兒哈赤], šurgaci)의 아들로 누르하치의 조카였던 아민([阿敏], amin)과 함께 4대 버일러가 되어 일정 기간마다 교대하면서 누르하치와의 공동 통치를 담당하였다.

누르하치 사후 홍타이지는 다이샨의 추대에 힘입어 1626년 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1629년 4대 버일러의 공동 통치제도를 폐지한 것을 시작으로 1630년에는 아민을 실각시키고, 1635년에는 이미 사망한 망굴타이의 집안을 역모 혐의로 축출하였다. 그리고 이들 휘하의 기인(旗人) 조직을 재편하여 정람기(正藍旗)를 자신의 맏아들 호오거([豪格], hooge) 휘하로 예속시키고, 이를 자기 휘하의 정황(正黃)·양황기(鑲黃旗)와 함께 상삼기(上三旗)로 편제하여 팔기를 장악하려 하였다. 또한 1629년 문서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문관(文館, [bithei yamun])을 설치하고, 1631년 6부를 설치하고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1636년에는 문관을 개편하여 내삼원을 세우는 등 중국식 제도를 활용하여 통치제도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

홍타이지는 1627년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세력을 공격하고 조선을 굴복시켜 형제국의 맹약을 맺었으며(『인조실록』 5년 3월 3일), 삼순왕(三順王)으로 대표되는 명의 항장(降將)들을 수용하면서 한군기인(漢軍旗人)을 편성하고 해군력을 비롯한 군사력을 확충하였다. 또한 서쪽으로는 내몽골의 차하르를 공략하여 1634년 릭단 칸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의 옥새를 얻은 뒤, 홍타이지는 1636년 만주·몽골·한인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청으로 고쳤다. 이후 홍타이지는 여러 관련 국가 제도들을 개편하는 한편, 조선을 침공하여 군신의 관계를 맺는 등(『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대외적으로도 황제국의 입지를 굳히고자 하였다. 1643년 사망하였다.

묘소

사망 후 유해는 화장되어 성경(盛京)에 안장되었으며, 능묘는 소릉(昭陵)이다.

상훈 및 추모

시호는 만주어로 겅기연 수(genggiyen su), 한문으로는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이며, 축약하여 문황제(文皇帝)라고도 한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참고문헌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옌 총니엔 지음, 장성철 옮김, 『대청제국 12 군주열전』, 산수야, 2007.
  • 이블린 S. 로스키 저, 구범진 역, 『최후의 황제들』, 까치, 2010.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저, 양휘웅 역, 『만주족의 역사』, 돌베개,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