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아문제(海牙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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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러시아의 제안으로 고종이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외교권 회복을 이루고자 네덜란드헤이그의 국제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일.

개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고종은 1905년(광무 9) 외교권을 상실하고 통감부의 억압을 받는 상황을 국제적으로 호소하여 타개하고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이들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억압과 국권 회복의 문제 등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개최국인 러시아의 배신과 일본 정부의 외교적 훼방과 더불어 외교권이 없는 대한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는 지적에 따라 회의 참석에 실패하였다. 다만 이위종이 각국 언론인들에게 일제에게 억압받는 한국의 실정을 호소함으로써 한국 문제를 국제 여론에 환기시키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특사들은 일제에 의하여 궐석 재판으로 심리되었고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특사를 파견한 배후로 고종을 지목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양위하게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역사적 배경

대한제국은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에게 외교권을 강탈당하고 통감부에 의한 간접 통치를 당하였다. 고종은 이런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한국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발단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1904년 발의하였으나 회의 개최 권한은 러시아 정부에 양도되었다. 회의는 44개국 256명의 대표가 참여하여 군축 문제, 그리고 국제분쟁을 무력이 아닌 중재재판이라는 법적 장치를 통하여 해결하는 데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있었다. 이때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 군사력이 아닌 국제법적 측면에서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당시 러시아외무대신람스도르프는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면 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05년 10월 9일 러시아 정부는 주러한국 공사이범진을 통하여 회의에 한국을 초청한다고 하였다. 또한 고종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하자 그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던 중 러시아 측의 제안에 따라 국제회의에서 일제의 부당함을 알려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1906년 10월 9일 러시아는 주일 공사를 통하여 한국의 회의 참가를 누설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회의 참석은 불가능해졌고, 고종이 파견한 특사를 빌미로 일본 정부의 한국 식민지화는 가속화되었다.

경과

헤이그 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10월 18일 막을 내렸다. 일본은 대한제국 법부를 이용하여 헤이그특사들을 관인사칭죄로 기소하였다. 7월 20일 당시 최고 사법기관이었던 평리원에서 당사자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궐석재판을 진행하여 주범 이상설에게는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언도하였다. 일본 정부는 헤이그사건을 을사조약에 대한 위반행위라고 하여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으며,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차관 정치를 시작하였다.

또한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1,000,000 회원의 연명으로 된 일한합방성명서(日韓合邦聲明書)를 공표하면서 헤이그 문제에 대해 한일병합을 가속화시킨 이유라고 지적하며 악용하기도 하였다(『순종실록』 2년 12월 4일).

참고문헌

  • 『통감부일기(統監府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정부 기밀문서 자료집』 선인, 2007.
  • 서영희,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집권세력의 정세인식과 대응방안」, 『역사와현실』 66, 한국역사연구회, 2008.
  • 최덕수,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1907)와 대한제국 언론의 세계인식」, 『한국사학보』 30, 고려사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