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왜인(恒居倭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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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항거왜인 |
한글표제 | 항거왜인 |
한자표제 | 恒居倭人 |
하위어 |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왜리(倭里), 삼포왜전(三浦倭田), 제포(薺浦) |
관련어 | 왜인(倭人), 수직왜인(受職倭人), 주인왜호(主人倭戶), 항왜(降倭), 향화왜인(向化倭人)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태종~선조 |
집필자 | 하우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항거왜인(恒居倭人) |
조선시대 일본인의 도항을 허가한 삼포(三浦)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
개설
조선 조정은 태종대에 국방상 문제와 경제적 차원에서 무질서하게 내항하는 일본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포소(浦所)를 제한하고, 그곳에 교역과 접대를 위한 공간으로 왜관(倭館)을 설치하였다. 조정에서는 삼포에 일본인의 내항을 허락하였는데, 점차 장기적으로 머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들을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고 하였다.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실태를 보면, 세종대 초기에 삼포 항거왜인을 모두 60호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항거왜인의 숫자는 이후에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세조·성종대에는 400호를 넘었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주에게 주기적으로 송환하도록 하였으나 계속 증가하자 1436년(세종 18) 왜리(倭里)라는 거주 지역을 설정하여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내용 및 특징
항거왜인의 삼포 거주를 허락한 이래 조정에서는 당초 60명에게만 잔류를 허가하였다. 이를 대마도에서는 60호로 늘려 받아들였고,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로 배치하였다. 그런데 항거왜인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1436년에는 대마도주 소 종정성(宗貞盛)에게 대하여 대마도로 쇄환(刷還)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결과 제포 253명, 부산포 29명의 항거왜인이 대마도로 송환되었고, 206명만 거주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항거왜인이 계속 불어나 조정에서는 가끔씩 쇄환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항거왜인에 대한 통제를 위하여 때때로 항거왜인의 인구 조사를 하였다. 1471년(성종 2)에 편찬된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제포의 항거왜인이 308호에 1,722명·사원 10개이고, 부산포는 67호에 323명·사원 3개, 염포는 36호에 131명·사원 1개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1471년에는 제포가 부산포보다 항거왜인이 5배이고 도래 왜인의 수도 2배에 달한 것으로 보아 가장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포가 일본인들에 의하여 많이 이용되게 된 이유는 조류의 영향이다. 즉, 제포-거제도-대마도의 경로가 조류의 방향상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은 조선의 사행원들에게도 자주 이용되었다.
한편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5년(성종 6)의 항거왜인 수가 『해동제국기』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총 호수가 430호, 인구가 2,209명이다. 삼포 중에서 제포가 가장 번성하여 308호에 1,731명을 차지하고 있는 점은 4년 전과 거의 비슷하다. 주목할 내용은 남자와 여자의 인구수가 각각 774명과 780명으로 거의 같다는 점이고, 승려가 51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연령별로 보아도 연소자에서 연로자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가족 단위의 거주 상태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역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주(移住)’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원이 15개나 있다는 점은 일본인의 생활문화까지 들어왔음을 뜻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바 항거왜인이 가장 많았을 때는 1494년(성종 25)으로 삼포 항거왜인의 총수가 525호, 3,105명에 이르렀다.
삼포 항거왜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왜리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조정에서는 항거왜인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도래 왜인들에 대한 공식적인 접대를 위한 왜관과는 별도로 왜리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왜리는 조선인 민가와 떨어진 장소에 설치되었다.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웅천제포지도(熊川薺浦之圖)」를 보면 조정은 일본인들이 살던 왜리와 조선인들이 살던 웅천읍성 사이에 제포토성을 설치하여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활권을 분리시켰다. 웅신고개 아래 오른쪽에는 왜관과 왜인촌이 있고, 왼쪽으로는 경상우도 수군진을 설치하였다.
조선전기 삼포에서의 왜리는 왜관과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조선후기와 구분된다. 후기의 초량왜관(草梁倭館: 현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공원 일대)에서는 일본인들이 6척 담장으로 둘러싸인 왜관의 내부에서만 생활하도록 규정되었다. 대마도의 성인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450명 정도가 왜관 안에서 거주하였다. 따라서 왜관 자체가 축소된 왜인촌으로 조선과 일본 양국민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조선후기의 왜관이 도항해 오는 왜인들의 일시적인 주거지였다면 삼포의 왜리는 항구적인 정착촌으로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면모는 조선후기의 왜관이 성인 남자 이외에는 체류할 수 없고 유녀(遊女)의 출입도 금지되었던 금녀(禁女) 구역으로 통제되었다는 점과는 크게 다르다. 삼포의 왜리는 항거왜인들의 가족 단위의 거주지 내지 정착촌이었음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 항거왜인들의 활동상을 살펴보자. 항거왜인들의 활동의 중심은 어업과 교역이었다. 항거왜인들은 삼포 근해에서 고기잡이와 해초 채취를 하였다. 이 시기 삼포 항거왜인들이 지닌 어로선은 부산포 30척, 제포 80척, 염포 15척 도합 125척에 달하였다. 1469년(예종 1)의 경우를 보면 대마도인이 삼포에 체재하면서 배를 만들었다. 삼포에는 항거왜인이 소유한 다수의 배가 있었는데, 조선(造船) 시설과 조선 기술자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의 어선은 삼포의 근해뿐 아니라 정해진 해역 밖에서 밀어(密漁)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1441년(세종 23)에는 전라도의 고초도까지 확대되었다.
항거왜인들의 교역 활동도 활발하였다. 특히 15세기 중반 제포의 항거왜인 중에는 상인이 많았고, 조선인에게 물고기와 소금을 팔았다. 밀무역하는 자들도 많아 조정에서는 금령(禁令)을 내리는 한편으로 항거왜인들의 주거 지역 주위를 장벽으로 둘러싸거나 관문을 설치하기도 하였지만 밀무역은 확대되었다.
그들은 또 삼포왜전(三浦倭田)이라는 토지를 경작하였다. 항거왜인들의 경작지는 왜리 밖으로까지 확장되어 조정에서 논의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토지 경작에 대하여 수세론(收稅論)이 논의되었으며, 1494년(성종 25)에는 항거왜인들의 토지 경작에 대하여 수세하기로 하였다. 그러다 뒤에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면세 혜택을 베풀기도 하였다.
항거왜인의 대다수는 대마도인들이었으며, 대마도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대마도주는 대관(代官)을 두어 그들을 통치하였으며, 징세권과 재판권, 유사시의 동원 등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주의 지배권을 보장해 주면서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삼포에는 항거왜인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있어 자활적인 조직 체계를 갖추어 활동하였다.
항거왜인에 대한 조정의 정책 변경과 관용책을 악용하여 그들의 법규 위반 사태가 자주 일어났는데 연산군대에 가장 심하였다. 항거왜인들은 밀무역, 고리대 행위, 토지 점유, 국방상의 기밀 누설 등 각종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에 1506년(중종 1) 중종은 즉위 초기에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엄격한 통제 정책을 펴 법규 위반을 엄하게 단속하였다.
변천
삼포에서의 항거왜인의 활동은 조선 조정의 의도와 달리 확대되어 갔다. 항거왜인의 수는 증가하고 그 활동도 허용된 범위를 넘어 밀어, 밀무역이라는 비합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삼포가 도시적 발전을 이루어 나감과 함께 조선 조정의 항거왜인에 대한 압박도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모순이 폭발한 것이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이다. 조선의 압박에 반발한 항거왜인이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반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조정은 대마도와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1512년(중종 7) 임신약조의 체결로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조정의 통제는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임신약조의 제1조의 내용이 일본인의 삼포 거주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제8조에는 대마도로부터의 왕래를 제포 한 곳으로만 제한하였다. 이리하여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삼포는 단일 포소로 축소되었고, 삼포의 항거왜인도 추방되었으며, 일본인 거류지도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삼포에서의 항거왜인의 활동은 삼포왜란 후 조선 조정의 전면적인 추방 조치에 의하여 완전히 종식되었다.
의의
1510년의 삼포왜란으로 인하여 삼포는 폐쇄되고 항거왜인은 모두 추방되었다. 이에 따라 삼포의 번영과 항거왜인의 정착촌이었던 왜리도 종식되었다. 조선전기 삼포에서는 항거왜인들이 조선후기의 초량왜관과 달리 상주하면서 조선인과 접촉·교류하였다. 이때도 왜관에는 담장을 쳐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왜리 또한 조선인 민가와는 떨어져 설치되었다.
그러나 왜리에서의 통제는 왜관의 그것과는 달리 일반인들의 접촉과 교류는 일정하게 허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항거왜인들은 조선의 문화·풍토·인물에 친숙해졌다. 그들은 조선의 문물에 길들여져 문화 도입을 촉진하였는데, 이러한 요소는 대마도의 문화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
참고문헌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 이현종,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 연구』, 국학연구원, 1964.
- 하우봉 외,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長節子, 『中世國境海域の倭と朝鮮』, 吉川弘文館, 2002.
- 佐伯弘次, 『對馬と海峽の中世史』, 山川出版社, 2008.
- 村井章介, 『中世倭人傳』, 岩波書店,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