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현(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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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함평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함평은 고려시대에 모평현(牟平縣)과 함풍현(咸豐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두 곳을 통합하여 함평현으로 하였다. 같은 해에 함풍현이 관할해 오던 1현 1향 1부곡을 폐지하여 함평현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 함평독진(咸平獨鎭)이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우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함평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나주진에 속했다. 1867년(고종 4)에는 함평을 비롯한 4개 고을과 다경포를 비롯한 9개 진이 모두 진도진(珍島鎭) 관할로 변경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해안 방어의 강화 차원에서 함평현에 포군(砲軍) 5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함평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는 백제현굴내현(屈乃縣)이었는데, 신라가 함풍이라고 고쳐서 무안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사』에는 고려에 와서 모평현으로 고치고 영광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함풍현을 영광군에 소속시키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파견하였으며,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영풍(永豐)·다경(多景)·해제(海際)의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임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1409년에 모평현과 함풍현을 합하여 함평현으로 개편하였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함풍현이 관할해 오던 1현 1향 1부곡이 폐지되어 함평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현은 해제로 고려 때부터 영광군의 임내(任內)로 있었는데, 1392년(태조 1)에 함풍현 소속이 되었다. 1향은 영풍이고, 1부곡은 다경인데, 두 곳 모두 고려 때부터 나주 소속이던 것을 1392년에 함풍현에 소속시켰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평현에 종6품 현감(縣監)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세종실록』 15년 2월 25일). 함평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하긴(下緊)으로 분류된 함평에는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함평현이 신설된 1409년부터 약 100년 동안은 현감의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600년(선조 33)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171인의 함평현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6세기 중반 이후 17세기 초까지는 무과 출신이, 이후는 문과 출신이 주로 임용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문과와 무과가 교대로 발령되다가, 1853년(철종 4)부터는 모두 음사 출신이 임용되었다.

변천

1445년(세종 27)에 함평현의 목장을 함평현감이 관리하게 하였다. 함평현 해제곶(海際串)에 목장을 설치한 뒤로 감목관(監牧官)이 없었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7년 4월 13일).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함평독진(咸平獨鎭)을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함평현은 나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나주거진이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바뀌었다. 전라우영의 속읍은 나주·광주·능주·영암·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52초, 표하군(標下軍) 210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65명으로 되어 있다.

1867년에는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진관(鎭管)을 변경하여 함평은 진도진 관할로 바뀌었다(『고종실록』 4년 1월 2일).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함평현에 포군 5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함평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함평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함평군사』, 함평군사편찬위원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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