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열현(咸悅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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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일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179년(고려 명종 6)에 감무를 두고 함라(咸羅)라 불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함열현이 관할해 오던 1향 1부곡을 폐지하여 함열현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416년(태종 16)에는 다시 함열현과 용안현으로 분리하고 각각 현감을 두었다. 1455년(세조 1)에는 함열현이 옥구진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함열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전주진(全州鎭)에 속했다. 1651년(효종 2)에 모친 살해 사건이 발생하여 함열현을 폐지하고 용안에 합친 일이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해안 방어의 강화 차원에서 함열현에 포군(砲軍) 3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함열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백제감물아현(甘勿阿縣)이었는데 신라 때 함열로 고치고 임피군에 속하게 하였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고려에 와서 함열현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전주목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1179년에 감무를 두고 함라(咸羅)라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1향 1부곡이 폐지되어 함열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향은 대위(大位) 또는 대부(大府)이며, 1부곡은 도평(桃平)이다. 같은 해에 용안(龍安)과 함열(咸悅)을 합하여 안열현으로 만들었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1413년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1416년에는 그것을 다시 나누어서 함열현과 용안현으로 하고 현감을 두었다(『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열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함열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전라도의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6원으로 되어 있다. 『속대전』에 그 가운데 함열현에 종4품 성당첨사(聖堂僉使) 1원을 두기로 규정되었다. 1890년(고종 27)에 모두 폐지되었다.

변천

1435년(세종 17)에 다시 함열현과 용안현의 합병 문제가 논의되었다. 전라도감사민심언(閔審言)은 함열과 용안이 땅이 좁고 백성도 적으며 이웃 고을과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서, 용안을 폐지하여 함열에 합칠 것을 건의하였다(『세종실록』 17년 7월 22일).

1651년(효종 2)에 유현일(柳玄逸)이 그의 모친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함열현을 폐지하고 용안에 합쳤다(『효종실록』 2년 4월 26일) (『효종실록』 2년 5월 19일).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중에 함열현으로 복구되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함열현은 전라도 옥구진(沃溝鎭)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함열현은 전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여산에 전라후영(全羅後營)이 설치되었다. 전라후영의 속읍은 여산·익산·고산·금산·진산·용안·함열·임피·옥구·용담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4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317명, 당보군(塘報軍) 117명, 수솔군(隨率軍) 629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함열현에 포군 3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함열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함열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그것이 함열면이 되어 익산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익산시사』, 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