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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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한일의정서 |
한글표제 | 한일의정서 |
한자표제 | 韓日議定書 |
동의어 |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 |
관련어 | 고문정치(顧問政治), 러일전쟁(露日戰爭), 일한협정(日韓協定), 한일협약(韓日協約)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
왕대 | 대한제국기 |
집필자 | 조재곤 |
시행시기 | 1904년(광무 8) |
시행기관 | 외부(外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
1904년(광무 8)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체결된 조약.
개설
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에 직면하여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과 국가의 독립을 보장하고 정부가 일본에 군사적 편의를 도모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러한 명목 아래 한국 침략을 군사적으로 강행하려는 데 있었다. 특히 제4조의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하고’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는 조항과, 제5조의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다.’는 조항은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동원과 외교권 제한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우리의 국권을 유린하였고, 나아가 군사행동은 물론 토지에 대한 강제수용도 임의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 하에 강압적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일본은 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는 정부 요인을 구속 제거하였으며 조인 후에는 반대 여론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정서가 교환되기 전날인 2월 22일 밤 일본군은 의정서 반대인물을 구속함으로써 조약교환에 성공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904년 2월 8일 일본군 제12사단이 서울로 들어오자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한일동맹조약 체결을 강요하게 된다. 이어 2월 11일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는 한국의 ‘전시중립선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이는 실제로 국제적으로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면서 이를 속히 철회하고 한일동맹조약을 체결할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보호국화’를 추진하였다.
연이어 하야시공사는 2월 13일 다시 “②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 강령을 성실히 보장한다. ③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 및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④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에 의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 및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필요(臨機必要)의 조치를 행할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러한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⑤ 양국 정부는 상호 승인 없이 장래 본 협약의 취지에 반(反)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는 내용의 조약안 초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일본이 견지해 오던 군사동맹적 성격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2월 23일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로 반영되었다.
이날 일본군 사단장 이하 장교들이 황제를 알현하는 등 군사적 위력을 통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 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었다.
내용
「한일의정서」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제1조, 시정개선에 관하여 일본의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일본은 한국 황실을 확실한 신의로서 안전 강령하게 할 것. 제3조,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확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시에는 일본 정부는 곧 임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십분 편의를 제공할 것. 일본 정부는 전항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상호 승인 없이는 본 협정의 취지에 반하는 협약을 제삼국과의 사이에 체결하지 않을 것. 제6조, 미비한 세부 조항은 일본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무대신이 정황에 따라 협정할 것이다.
변천
일본은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제1차 한일협약’이라 불리는 「한국의 재정 및 외교고문에 관한 일한협정」 체결을 강제하여 이른바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조선의 정치권 박탈에 이어 재정권·외교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본은 다시 10월 5일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산을 정리하였고, 13일과 17일 일본주차군 사령관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대장성 주세국장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 고문으로 부임시켰다.
러일전쟁 시 한국의 보호국화 정책은 주로 외무대신의 지시를 받지 않는 메이지 천황 직속의 주차군사령관을 정점으로 한 군대에 의하여 추진되었고, 전후에는 식민지화 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메가타는 대한제국의 화폐 생산을 담당하던 전환국(典圜局) 철폐로 일본 통화가 제한 없이 통용될 수 있게 하고, 관세를 담당하던 총세무사를 폐지하는 등 대폭적인 재정정리사업을 단행하였다. 다음 달 27일 주미일본공사관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를 외교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이라는 형식을 빌려 군사·경찰·궁중·학부 등에까지 일본인들을 파견하여 식민지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군사 고문으로는 일본 육군중좌 노즈 시즈다케[野津鎭武], 경무 고문에 일본 경시청 제1부장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궁내부 고문에 농상공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학부 참여관에 문학박사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를 각기 파견 내지 겸직시켜 해당 분야의 정책 수립과 집행에 깊이 간여하였다. 이들 고문관은 한국 주재 일본 공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고, 주요 사무는 반드시 공사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였다. 공사는 이를 일본외무대신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러일전쟁 과정에서 군사 행동은 물론 토지의 강제수용도 임의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일의정서」 성립 당일부터 일본은 반일관리의 고립화 및 퇴출에 주력하여 고종 황제의 재정 담당자였던 이용익을 일본으로 강제 납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2의 이용익’으로 불린 길영수와 황실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학균·현상건도 일본으로 강제 출국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같은 구상은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한국 지배 정책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고립시키고 그 자리에 국내와 일본에 망명 중인 친일적 인물들을 배치시킴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목적을 관철하려는 입장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1964.
- 최영희, 「한일의정서에 관하여」, 『사학연구』 20,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