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부(平壤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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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평양부 |
한글표제 | 평양부 |
한자표제 | 平壤府 |
관련어 | 서경(西京), 서경유수(西京留守), 호경(鎬京)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이상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평양부(平壤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
조선시대 평안도 평양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평양부(平壤府)는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서경으로 불리며 수도 개경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묘청(妙淸)의 난 이후 지위가 약화되기는 했으나 종2품의 유수를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에 거란과 몽골, 조선시대에 왜와 후금 등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점령되면서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평안도(平安道) 지역의 국방과 외교, 경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평양부는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면서 서경이라 불렸다. 서경유수를 두어 평안도 일대의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고, 평양부가 되면서 종2품의 윤을 두어 관할하였다. 평안도감영이 평양에 있어 관찰사가 부윤을 겸하였고, 한반도 서북 지역의 변방을 수호하는 책무와 함께 중국과의 외교 통로로서 대외적인 행정 업무도 담당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조직 및 역할
평양부는 고려 건국 직후부터 중앙정부의 행정기구와 비견되는 독립적인 행정기구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묘청의 난이 일어난 이후 대폭 개편되어 독립성을 상실하고 점차 토관직으로 변모되어 갔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3품 이상의 지서경유수사 1명을 두어 서경 지역의 업무를 총괄하게 했으며, 4품 이상의 부유수 1명, 6품 이상의 판관(判官) 2명, 7품 이상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2명과 장서기(掌書記) 1명, 8품 이상의 법조(法曹) 1명을 두어 행정 업무를 관할하였다. 1178년(고려 명종 8)에는 다시 관제를 개편하였는데 정3품의 부유수 1명, 5품과 6품의 판관 2명, 7품의 사록 1명, 8품의 서기 1명을 두고 그 아래에 녹사(錄事) 4명, 영사 4명, 서령사 8명, 기관(記官) 16명, 서수(書手) 2명, 산사(算士) 2명, 인직(印直) 2명, 전리(電吏) 25명의 관리를 두었다. 이후 충선왕 때 평양부로 고치고 종2품의 윤(尹)과 정4품의 소윤, 정5품의 판관, 정7품의 참군을 두었으며, 충숙왕 때는 안정도(安定道)의 존무사(存撫使)가 평양부윤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다시 서경유수로 하였다가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평양부로 하고 종2품의 윤을 두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의하면 외관직으로 종2품의 부윤 1명을 두되 관찰사가 겸하였고, 종4품의 서윤(庶尹) 1명과 종5품의 판관 1명, 역학훈도(譯學訓導) 1명을 두도록 하였다. 이후 『속대전』에는 판관을 모두 없애도록 하여 『대전회통』이 편찬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조선후기에 살인사건이나 강상과 관계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고을의 명칭을 강등했는데, 평양은 옛 도읍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서윤을 판관으로 강등하는 등 관원의 품계만 강등 또는 승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평양부의 동·서반 토관직을 정하였다. 토관직은 지방의 효율적인 행정 운영과 군사조직 강화를 위해 지역의 토착인을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당시 동반의 토관직으로 도부사(都府司)에는 도부(都府), 부도부(副都府), 승(丞) 각 1명, 주부(注簿) 2명, 군기서(軍器署)는 영(令), 주부, 직장(直長), 녹사 각 1명, 전빈서(典賓署)는 영, 승, 주부, 직장, 녹사 각 1명, 정설국(正設局)은 영, 승, 주부, 직장, 녹사 각 1명, 전례국(典禮局)은 영, 승, 주부, 녹사 각 1명, 영작원(營作元)은 사(使), 부사(副使) 각 1명, 판관 2명, 녹사 1명, 제학원(諸學院)은 사, 부사, 판관 각 1명, 녹사 2명, 전주서(典酒署)는 영, 직장 각 1명, 녹사 2명, 인흥부(仁興部)는 사, 부록사(副錄事) 각 1명, 예안부(禮安部)는 사, 부록사 각 1명, 의흥부(義興部)는 사, 부록사 각 1명, 지안부(智安部)는 사, 부록사 각 1명, 신평부(信平部)는 사, 부록사 각 1명, 사창서(司倉署)는 주부, 직장, 녹사 각 1명, 수지서(收支署)는 주부, 직장, 녹사 각 1명, 장선서(掌膳署)는 주부, 직장, 부록사 각 1명, 사옥서(司獄署)는 직장, 부록사 각 1명, 장루서(掌漏署)는 직장, 녹사 각 1명 등 60명을 두었다.
이것이 성종 때 정리된 『경국대전』에는 도무사(都務司)에 정5품 도무(都務) 1명과 정6품 교부(校簿) 1명, 정7품 전사(典事) 2명을 두고, 전례서(典禮署)에 종5품 장부(掌簿), 종6품 감부(勘簿), 정7품 전사, 종8품 급사(給事), 종9품 섭사(攝事) 각 1명을 두고, 제학서(諸學署)·융기서(戎器署)·사창서·영작서(營作署)에 종6품 감부(勘簿) 각 1명, 정8품 관사(管事) 각 1명, 섭사 각 2명을 두었다. 수지국(收支局)에는 종7품 장사(掌事), 종8품 급사, 섭사 각 1명을 두고, 전주국(典酒局)에는 급사 1명, 정9품 참사(參事) 1명, 섭사 1명,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2명, 사부(四部)인 인흥(仁興)·예안(禮安)·의흥(義興)·지안(智安)에 섭사 각 2명을 두는 것으로 법제화되었으며, 조선후기 『대전회통』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밖에 서반 진서위(鎭西衛) 토관직은 1영(領)은 사직(司直), 섭사직(攝司直), 부사직(副司直), 섭부사직(攝副司直), 사정(司正), 섭사정(攝司正), 부사정(副司正), 섭부사정(攝副司正), 사용(司勇), 섭사용(攝司勇) 각 1명, 대장(隊長) 10명, 대부(隊副) 30명으로 하고, 2영은 섭사직 1명, 섭부사직 2명, 섭사정 2명, 섭부사정 2명, 사용 1명, 섭사용 2명, 대장 10명, 대부 30명으로 하고, 3영은 섭사직 1명, 섭부사직 2명, 섭사정 2명, 섭부사정 2명, 사용 1명, 섭사용 2명, 대장 10명, 대부 30명으로 하고, 4영은 섭사직 1명, 섭부사직 2명, 섭사정 2명, 섭부사정 2명, 사용 1명, 섭사용 2명, 대장 10명, 대부 30명을 두었다. 동반은 주로 제반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서반은 군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평양부는 부방제(部坊制)를 실시하여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인·의·예·지의 유교 윤리의 명칭을 따라 인흥부(仁興部), 의흥부(義興部), 예안부(禮安部), 지안부(智安部) 등의 4부로 나누어 행정을 담당하도록 했고, 그 아래 46방(坊)을 두었다가 조선후기에는 36방을 두었다. 방 아래에는 리(里) 혹은 동(洞)을 두었다.
변천
평양부는 삼국시대 427년(고구려 장수왕 15)에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부터 도읍지로서의 위상을 지녔다. 고려시대 918년(고려 태조 1)에는 황해도 사람들을 평양으로 옮기고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았으며, 곧이어 서경으로 고쳤다. 960년(고려 광종 11)에 서도(西都)라 불렀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지서경유수(知西京留守)를 두었으며, 997년(고려 목종 1)에는 호경(鎬京)이라 불렀다. 1062년(고려 문종 16)에는 다시 서경유수를 두고, 수도 개경과 동일한 지위로 격상하여 경기4도(京畿四道)를 설치하고, 수도와 구별하기 위해 서경기4도라 하였다. 1102년(고려 숙종 7)에는 문·무반(文·武班)과 동·서·남·북·중의 행정구역 5부(部)를 별도로 두게 하여 수도 개경과 대등한 제도·위치 등을 갖추었다. 1129년(고려 인종 7)에 묘청 등이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 버린 개경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1135년(고려 인종 13)에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한 후 서경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관리의 수를 대폭 축소하고 서경기4도를 해체한 후 강동(江東), 강서(江西), 중화(中和), 순화(順和), 삼등(三登), 삼화(三和)의 6개 현으로 개편하였으며 서경 순주제도 폐지하였다. 1174년(고려 명종 4)에는 서경유수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켰고, 1216년(고려 고종 3)에는 몽골군에 쫓긴 거란족이 침입하여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1231년(고려 고종 18)의 몽골 제1차 침입 때는 홍복원(洪福源)이 서경을 점령하는 등 환란이 계속되었다. 이후 1269년(고려 원종 10)에는 최탄(崔坦) 등이 서경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인근 여러 성을 점령한 후 몽골에 부용하였고, 몽골은 서경에 고려안무사(高麗安撫司)를 주둔시키고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고쳤다. 동녕부는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고려에 반환되어 다시 서경유수관을 두었다가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평양부로 개칭하고 종2품의 윤을 두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태조 4)에는 평양에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를 파견하여 서북 방면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서북면을 평양과 안주에서 한 글자씩을 따 평안도로 개편하고(『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평양부에 관찰사를 두어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삼남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평안도로 이주시켜 안주하도록 했고, 세조 때는 진관(鎭管)을 설치하여 7개 고을을 관할하도록 하다가 이후 삼화현에 방어사를 따로 두면서 6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하였으며, 왜군은 7개월 동안 평양부를 점령하면서 만행을 저질렀고, 병자호란 때에도 평양이 점령되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1733년(영조 9)에 평양성과 도시의 일부를 수축하여 도시를 정비하였다. 평양부는 풍부한 물산과 경승지가 많아 서북 지방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의주로를 따라 중국과 왕래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866년(고종 3)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여 외부 세력에 저항한 현장이었고, 1894년(고종 31)에는 청국과 일본과의 전쟁으로 격전지가 되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부군제(府郡制)를 실시함에 따라 평양부는 23부 중의 1부가 되어 평양군 등 27개 군을 관할하였고, 이듬해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평안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평양지(平壤誌)』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제6권, 2012.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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