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집람(通鑑輯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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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통감집람 |
한글표제 | 통감집람 |
한자표제 | 通鑑輯覽 |
분야 | 사서 |
유형 | 한문 |
지역 | 중국 |
시대 | 청 |
왕대 | 건륭 |
집필자 | 성낙수 |
간행년일 | 1767 |
권책수 | 120권 20책 |
소장처 |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통감집람(通鑑輯覽) |
중국 청나라 건륭(乾隆) 32년(1767) 황제의 명에 따라, 황제(黃帝) 때부터 명대(明代)까지의 사적(史跡)을 기록한 사서(史書).
개설
『통감집람(通鑑輯覽)』은 중국 청나라 건륭(乾隆) 32년(1767)에 황제의 명에 따라, 황제(黃帝) 때부터 명대(明代)까지의 사적(史跡)을 기록한 사서(史書)다. 명나라의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撰要)』를 바탕으로 하여, 증ㆍ개편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청(淸) 고종(高宗)의 칙명(勅命)으로 부항(傅恒) 등 유신(儒臣)들에 의해 편찬된 관수(官修) 사서다. 당시 고종은 명(明) 정덕(正德) 연간(年間;1506-1521)에 이동양(李東陽) 등이 편찬했던 『통감찬요(通鑑纂要)』를 읽고, 그 포폄이 부당하고, 기재(紀載)가 거칠어서, 사서로서 크게 부족하다고 여겨‚ 이에 편정(編訂)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춘추(春秋)』에 따르는 범례(凡例)와 서법(書法)을 갖추도록 하고‚ 상세히 평단(評斷)을 가하고, 미언대의(微言大義)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고종이 핵정(核定)과 비주(批注)를 덧붙였기 때문에 서명(書名) 앞에 ‘어비(御批)’를 붙이기도 하고‚ 약칭하여, 『통감집람(通鑑輯覽)』이라고도 한다. 본문은 116권이며, 남명(南明)의 당(唐)‚ 계(桂) 두 왕의 사적(事迹)을 각 1권‚ 3권씩 덧붙여서 총 120권으로 이루어졌다. 황제(黃帝)로부터 명대(明代)까지를 다룬 편년체 역사서로서‚ 강목(綱目)이 상종(相從)하고 일목요연하지 않은 것은 별도로 본문 아래에 분주(分註)하였다.
서지 사항
120권 2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판본이다. 크기는 세로19.6cm 가로 12.4 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음절훈고(音切訓故)와 전고사실(典故事實)의 고증이 필요한 경우도 그 아래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전 사람들의 사서(史書)를 기초로 하여, 번잡한 것을 잘라내고, 간략히 한 것이나, 자체적인 범례(凡例)를 정하여, 사료 취사 기준을 삼고, 수천 년에 걸친 대사(大事)들의 원인과 결과를 간명히 서술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초학(初學)들의 이용에 매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의 편찬을 명한 건륭제(1711~1799)는 이름이 홍력(弘曆)이며, 시호는 순황제(純皇帝)다. 묘호는 고종(高宗)이며,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鈕祜祿)이고, 황후는 부찰(富察)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ㆍ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人) ㆍ한인(漢人)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ㆍ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大金川) 평정(1749), 대 ㆍ소금천(大小金川) 평정(1776), 타이완(1788) ㆍ미얀마(1778) ㆍ베트남(1789) ㆍ네팔(1790ㆍ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南巡) 6회, 동순(東巡) 5회, 서순(西巡)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外征)과 내순(內巡), 천수연(千叟宴)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和珅)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瀆職), 만주인ㆍ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白蓮敎)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도 융성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ㆍ기술이 전래되고, 중국 문화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는 등 국제 교류도 확대되었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이 책의 편찬에 큰 역할을 한 부항(傅恒;1720년 추정~1770년 추정)은 만주(滿洲) 양황기(鑲黃旗) 사람으로 이름을 부찰(富察)이라고도 하며, 자는 춘화(春和)다. 청(淸)나라 대신이자, 무장(武將)이다. 청 고종(高宗)효현순황후(孝賢純皇後)의 아우로 벼슬은 시위(侍衛), 총관내무부대신(總管內務府大臣), 호부상서(戶部尚書), 군기대신(軍機大臣), 태자태보(加太子太保),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 평판이소통수(平叛伊犁統帥) 등을 역임했다. 1748년에 대금천(大金川)의 전쟁을 지휘하여, 사라본(莎羅本) 부자(父子)를 항복시켰다. 1769년에 만주족과 몽골족 병사 1만3천 명을 이끌고 미얀마 전투에 참여했으나, 질병에 시달려, 여러 차례 패전을 했다. 최후에는 미얀마와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통감집람(通鑑輯覽)』 등의 편찬에 참여한 조익은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재명(才名)을 떨쳤다. 1750년 거인(擧人)이 되었고, 1754년 내각중서(內閣中書)를 제수 받고, 군기처(軍機處)에 들어갔다. 1761년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전시(殿試)에서 장원에 내정되었으나‚ 건륭제(乾隆帝)의 뜻으로 3등인 왕걸(王杰)과 석차를 바꾸었다.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가 되어 이 책의 간행에 참여했다.
참고문헌
- 신지영, 「건륭제가 청대 내정연희 발전에 미친 영향」, 『중국어문학』 제50호, 영남중국어문학회, 2007.
- 이준갑, 「건륭49년(1784)~51년(1786)의 교안과 건륭제」, 『동양사학연구』 제121집, 동양사학회, 2012.
- 이희관, 「건륭제와 곽보창 그리고 Percival David」, 『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 제30호,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