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정(太古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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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고정 |
한글표제 | 태고정 |
한자표제 | 太古亭 |
관련어 | 소오헌(嘯傲軒), 와유암(臥遊菴), 조심지(照心池), 척금지(滌衿池), 청풍계(淸風溪), 청풍지각(淸楓池閣), 함벽지(涵碧池) |
분야 | 왕실/왕실건축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유주은 |
장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청운초등학교 뒤편) |
관련 인물 | 김상용(金尙容)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고정(太古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4년 2월 28일, 『정조실록』 14년 2월 28일 |
청풍계의 김상용 집터에 있던 정자.
개설
태고정(太古亭)은 선조 때 지은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집터에 있던 정자이다. 문인들이 많이 방문하여 청풍계(淸風溪)의 수려한 풍치를 시로 남겼다. 인왕산(仁王山)과 백악산(白岳山) 사이의 절경인 청풍계의 중심에 있던 정자로 유명하다.
위치 및 용도
태고정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에 있는 청풍계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속하며 청운초등학교 뒤편을 말한다. 주로 왕이나 왕족들이 찾아와 휴식을 취하거나 주변 경관을 감상하던 곳이었다(『정조실록』 14년 2월 28일). 또한 김상용이 주변의 문인들과 함께 계회를 열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김영(金瑛)의 손자인 김기보(金箕報)가 안동으로 낙향할 때 이 집터를 김상용에게 물려주었으며, 1607년(선조 40)에 김상용은 청풍계에 가택을 두고 정자를 지었다. “산이 고요하여 태고와 같다[山靜似太古]”는 시구를 이용하여 그 정자를 태고정이라 하고 태고의 고요함을 지키고자 하였다. ‘주변 바위에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새겼는데, 김상용의 사후에도 이 글자는 잘 보존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왕이 때때로 방문하였으며, 김상용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을 만나 관직을 내리고 집을 수리해 주었다(『정조실록』 14년 2월 28일). 이후 1895년(고종 32)에 장동관립소학교(壯洞官立小學校)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삼정(三井)물산회사가 들어서면서 계곡을 메우고 일부 암석을 없애며 터를 넓혀 새로 집을 지었다. 이때 태고정은 한 칸만 남아서 인부의 숙소가 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훼손되었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층이며, 월대를 만들어 지은 사각 형태의 모정(茅亭)으로 조성되었다. 후에 김상용은 태고정 주변에 소나무를 식재하여 주변 송림(松林)과의 어울림을 유도하였다. 태고정 우측으로는 청풍지각(淸楓池閣), 소오헌(嘯傲軒), 와유암(臥遊菴) 등이 조성되었다. 태고정 주변으로 돌을 둘러쌓아 만든 방지 형태의 연못 3개, 즉 조심지(照心池), 함벽지(涵碧池), 척금지(滌衿池)가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김상용의 집터는 원래 학조대사(學祖大師)가 그의 막내 동생인 김영수(金永銖)의 처인 강릉김씨를 위해 정해 주었다. 일찍이 혼자되었던 강릉김씨는 3형제를 슬하에 두었다. 이 중 장남인 김영(金瑛)은 이조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삼당(三塘) 또는 낙재(樂齋)였다. 삼당이라는 호는 청풍계의 집에 있던 세 연못, 즉 조심, 함벽, 척금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중기 학자 촌은(村隱)유희경(劉希慶)은 태고정 경치를 ‘청풍계 납시다가 태고정에 올랐네. 뜨락에 구름을 쓰는 사람 없는데, 시냇물 소리는 많이 와서 듣는다. 가느다란 댓줄기 처마에 닿아 서늘한데 늙은 소나무 그늘 골짜기 가득 푸르구나. 어느 때나 티끌세상 떠나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거나.’라고 읊었다.
참고문헌
- 『국도팔영(國都八詠)』
-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
- 『한경지략(漢京識略)』
- 문일평, 『한국의 산수』, 신구문화사, 1984.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81.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