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춘영(蕩春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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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탕춘영 |
한글표제 | 탕춘영 |
한자표제 | 蕩春營 |
관련어 | 탕춘대(蕩春臺), 북한산성(北漢山城), 총융청(摠戎廳), 군영(軍營), 연융대(鍊戎臺), 군영(軍營) |
분야 | 정치/군사·국방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탕춘영(蕩春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12년 1월 27일, 『영조실록』 23년 5월 6일, 『영조실록』 24년 2월 20일 |
조선시대 숙종대에 탕춘대 성곽 자리에 설치한 군영으로 북한산 문수봉 아래 위치.
개설
조선전기에 연산군이 여흥을 위해 북한산 봉우리의 인근에 세운 건물을 탕춘대(蕩春臺)라고 하였으며(『연산군일기』 12년 1월 27일), 그 자리에 영조대에 총융청에서 세운 군영을 탕춘영(蕩春營)이라고 했다. 탕춘영이 위치한 곳은 도성과 북한산성을 동시에 방어하는 연결 부위였다. 숙종대에는 탕춘대에 도성을 방어하거나 사수할 때 필요한 도성민의 양식을 사전에 보관할 창고와 방어시설을 만들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총융청에서 탕춘대에 군영을 설치한 것은 남한산성과 기각(掎角)을 이루어서 도성을 방어하려는 계획에서 시작하였다. 영조대에 총융청이 북한산성을 이관받으면서 탕춘대에 영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영조실록』 23년 5월 6일). 영조는 탕춘대가 도성의 인후(咽喉)라면서 삼청동에 있던 총융청을 옮기게 하여 군영을 세우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4년 2월 20일).
조직 및 역할
1사(司) 5초(哨)의 조직 군제를 바탕으로 파하군(把下軍), 별파군(別把軍), 아병(牙兵), 표하군(標下軍)으로 조직하였다.
변천
1801년(순조 1) 순조 집권 초기에 총융청의 재력이 조잔해져서 일꾼들의 급료는 물론 군사들의 시험도 치르지 못했다. 북한산성의 행궁과 각처의 공해(公廨)도 대부분 퇴락하였으나 재력을 조달하여 수리할 가망이 없었다. 이에 따라 관서(關西) 상진곡(常賑穀)의 모조(耗條)를 가져다 사용하기도 했다.
고종대에는 군제 개편으로 총어영(摠禦營)이 자리를 잡았다. 1889년(고종 26) 탕춘영에 화재가 발생하여 화약 8만 근이 전소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6년 4원 21일 2번째기사].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울소재 성곽 조사보고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3.
-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나각순, 「서울 한양도성의 기능과 방어체제」, 『향토서울』80, 2012.
- 민덕식, 「서울 탕춘대성의 축조과정」, 『향토서울』80, 2012.
- 원영환, 「조선후기 도성수축과 수비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33, 1975.
- 차용걸, 「서울 도성과 방어유적의 복원·보존 및 과제-서울성곽·북한산성·탕춘대성」, 『향토서울』7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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