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암(七佛庵)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신라시대 옥보고 관련 설화가 전해지는 지리산 쌍계사의 산내 암자.

개설

칠불암(七佛庵)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 혹은 신라 마지막 국왕인 김부의 일곱 왕자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거문고의 대가인 옥보고(玉寶高)와 관련한 창건 설화도 전한다. 칠불암은 쌍계사의 산내 암자로서 조선후기에는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알려졌으며, 아자방(亞字房)에서는 수행자가 끊이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및 옥보고 관련 설화

칠불암은 하동 쌍계사 북쪽 30리에 있는 쌍계사의 산내 암자였지만, 지금은 독립된 사찰로 승격하여 칠불사(七佛寺)라고 부른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외삼촌인 장유보옥(長遊寶玉) 스님을 따라 이곳에 와서 수도한지 2년 만에 모두 부처가 되었으므로 칠불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던 유학자들이 칠불사에서 「칠불사사적기(七佛寺事跡記)」를 보고 요약한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마지막 국왕인 김부(金傅)의 일곱 아들이 이 절에서 독서하다가 머리를 깎고 수도하여 성불하였으므로 칠불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유래는 송광연(宋光淵)의 「두류록(頭流錄)」(1680), 황도익(黃道翼)의 「두류산유행록(頭流山遊行錄)」(1744), 유문룡(柳汶龍)의 「유쌍계기(遊雙溪記)」(1799) 등에 남아 있다.

1807년(순조 7)에 남주헌(南周獻)이 「지리산행기(智異山行記)」에서 칠불암(七佛庵) 창건 설화에 대해 기록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칠불암은 운상원(雲上院)이라 불리던 곳으로 진금륜(眞金輪)이라 이름 하기도 한다. 옛날 신라 때 사찬(沙飡)김공영(金恭永)의 아들인 옥보고(玉寶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메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거문고를 타며 마음을 수양하면서 50년 동안 30곡조를 작곡하여 날마다 연주하였다. 경덕왕이 그 소리를 듣고 악사(樂士)였던 안장(安長)과 청장(請長)에게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하고 묻자,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 소리는 신선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경덕왕이 7일 동안 재계(齋戒)하자 옥보고가 왕 앞에 나아와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경덕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가 거주하던 곳을 고쳐 사찰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경덕왕은 스스로 범왕(梵王)이라 칭하고 일곱 왕자를 모두 부처라고 불렀다. 그래서 칠불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의 여러 문헌을 통해서 일곱 왕자의 부왕(父王)에 관한 기록이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고, 19세기에는 칠불사가 칠불암으로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일곱 왕자는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아들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불교계 문헌에서 전하는 기록은 조금 다르다. 연담유일(蓮潭有一)은 『석전류해(釋典類解)』에서 옥보선인이 옥피리를 부르자 신라 왕자 일곱 명이 동시에 그 옥피리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와서 출가하였으므로 칠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암응윤(鏡巖應允)은 「칠불암기(七佛庵記)」에서, 칠불암은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이 궁모(宮母) 다섯 사람과 함께 이곳에 와서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칠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였다.

(2) 수행에 관한 기록

칠불사에 들렀던 유학자들은 또 칠불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승려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김도수(金道洙)는 「남유기(南遊記)」(1727)에서 8~9명의 승려들이 벽을 향해 참선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고, 이주대(李柱大)는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1748)에서 10여 명의 승려가 선정에 들어 손님이 와도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한 박래오(朴來吾) 역시 「유두류록(遊頭流錄)」(1752)에서 6~7명의 승려가 가사를 몸에 걸치고 마니(摩尼)로 만든 염주를 지니고서 아자방(亞字房)에서 벽을 향해 참선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1785년 선전관(宣傳官)이윤춘(李潤春)이 지리산의 도적에 대해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칠불암에 대해 말하기를,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苑)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 칠불암의 아자방(亞字房)에서는 승려 9명이 하루 종일 벽을 향하여 말을 하지 않고 좌선하였는데 아침에 모였다가 저물녘에 흩어졌고 하였다(『정조실록』 9년 3월 23일).

(3) 조선후기 칠불사 구조와 아자방지

경암응윤의 「칠불암기」에서 칠불암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사찰의 중심 법당인 비로전(毘盧殿)의 내부에 청허휴정(淸虛休靜) 스님이 직접 쓴 기문(記文)이 있다. 그리고 비로전의 동쪽에는 약사석불(藥師石佛), 서쪽에는 고승당(高僧堂)이 있다. 고승당은 온돌로 침상을 만들었는데 높은 데나 낮은 데나 똑같이 따뜻하였다. 고승당에서 벽을 향해 좌선할 적에는 말을 하지 않고 달마(達磨)의 마음을 참구하였다. 칠불암에서 올라가면 옥보대(玉寶臺)가 있고, 그 서북쪽 언덕에는 부휴선수(浮休善修) 스님의 치아탑(齒牙塔)과 추월(秋月) 능선사(能禪師)의 부도가 있다고 하였다.

경암응윤이 고승당이라고 한 건물은 칠불사아자방지(七佛寺亞字房址)를 말한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담공(曇空) 스님이 이중(二重)의 온돌방을 ‘아(亞)’ 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전한다. 1951년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다. 아자방은 길이가 약 8m이고,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곳이며 중앙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곳으로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온돌은 만든 이래 1,000년을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고친 일이 없다고 하는데, 한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한 달 동안이나 따뜻하다고 한다.

(4) 칠불사 명승의 글과 간행물

칠불사 명승이 남긴 글로는 청허휴정의 제자 중관해안(中觀海眼)의 「운상원추야(雲上院秋夜)」, 편양언기의 「봉래산운수암종봉당영기(蓬萊山雲水庵鍾峰影堂記)」, 운곡충휘(雲谷沖徽)와 허백명조(虛白明照)의 시(詩) 등이 전한다. 칠불사에서 간행한 불서(佛書)로는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1531), 『임성당대사행장(任性堂大師行狀)』(1657), 『현행법회예참의식(現行法會禮懺儀式)』(1710),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1710)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 이종수,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남명학연구』46,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7.
  • 최석기 외 옮김, 『지리산 유람록 –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보고사, 2008.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3』, 보고사, 2009.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4』, 보고사, 2010.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5』, 보고사, 2013.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6』, 보고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