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림무과(親臨武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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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이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시험에 직접 나아가 참관하는 일. 또는 친히 참관해야 하는 시험.

개설

조선시대에 무관을 선발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무과는 고려말에 도입된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에 따라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 과정이 마련되었다. 전시는 원칙적으로 왕이 직접 참석해서 합격자의 최종 석차를 정하였다. 정기시인 식년무과에서는 28명만 선발하므로 무관의 정원을 채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수시로 비정기인 특별시를 실시하여 인원을 보충하였다. 그중에는 알성시처럼 왕이 친림해야 하는 시험도 있었다. 『속대전』에 이르러 정식으로 임금의 친림이 규정되었는데, 알성시 무과, 관무재 복시 등이 그에 속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무관을 선발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던 무과는 처음부터 고려말에 도입된 과거삼층법에 의거하여 운영되었다. 즉, 제1차 단계 시험인 향시(鄕試)를 거친 자만이 제2차 단계 시험인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합격한 자만이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올라갈 수 있었다. 원래 전시는 왕의 친림 하에 실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이 직접 시험장에 나아가 관료 후보자를 선발하였다. 이를 통하여 왕이 최종 합격자를 결정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무과는 시작하였을 때부터 전시에 왕이 친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429년(세종 11)에 제정되었던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에서는 왕이 참석하는 것을 전제로 그에 관한 절차와 의례가 규정되었다(『세종실록』 11년 1월 24일). 다만 특별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왕이 참석하기 몹시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세자가 대행하는 경우가 있었다(『세종실록』 30년 6월 16일).

그런데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식년무과 이외에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여러 가지 명목의 특별시가 있었다. 이는 국가의 경사와 각종 행사가 있을 때나 기타 필요에 의하여 임시적으로 행해졌다. 이로 인하여 시험 절차나 방법, 선발 인원 등이 그때의 사정에 따라 각각 달리 규정되었다. 자연히 과거삼층법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즉, 전시가 반드시 설정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왕의 참석도 법에 의하여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무과가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출석하는지 하지 않는지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임시로 결정되기도 하였다.

비정기적으로 실시되는 특별시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며 매우 빈번하게 베풀어졌다. 이것은 먼저 식년무과의 근본적인 모순에서 비롯하였다. 3년에 한 번 선발하는 인원이 28명에 불과하였다. 무관의 실제 정원이 문과보다 훨씬 많았는데도 문과의 33명에 비하여 적게 뽑았다는 것은 무관의 부족 현상을 초래하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자연히 이를 채우기 위하여 특별시를 자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양반 관료제의 성장과 더불어 과거제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단지 관료가 되고자 하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아닌 다른 길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출신 가문의 배경으로 입사하는 음서(蔭敍)와, 법전에 수록된 바에 따라서 천거(薦擧)로 들어가는 경우 등이 있었다. 하지만 양반 관료제가 확고하게 정착하고 종전에 비하여 더욱 활발하게 기능하였던 것과 동시에 과거 출신이 아닌 자가 관료가 되면 그 위상이 도리어 확연하게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과거의 합격은 관료가 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출세 여부와 함께 사회적으로 인정까지 받게 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관료로서 당당하게 행세하려면 과거의 합격이 필수가 되었으며, 이는 무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무과의 위상이 높아진 데 반하여 그 나머지 고시는 정체되거나 떨어지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누구나 과거 급제를 희망하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가에서는 무관의 정원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전쟁 등의 위급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민심을 달래는 차원에서 엄청난 수의 합격자를 뽑는 특별 시험을 실시하였다. 나중에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실시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비정기시가 늘어나자 왕의 참석률은 도리어 떨어지고 말았다. 모든 무과에 전부 참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으로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왕이 반드시 친림해야 하는 시험이 법전에 규정되었다. 이는 『속대전』에 친림하는 무과를 따로 기록함으로써 정식 법제가 되었다. 그에 해당하는 것이 알성시(謁聖試)와 관무재 복시(觀武才覆試)였다. 그 밖의 무과에도 왕이 참석하는 예는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알성시 등은 원칙적으로 왕이 친림해야 실시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법전에 특별하게 명시되었다.

알성시는 원래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공자 등을 참배한 뒤에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특별시였다. 처음에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1434년(세종 16)에 비로소 무과도 문과와 함께 실행되었다. 원칙상 시험 자체가 왕이 문묘에 직접 행차한 뒤에야 실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하여 신하에게 임시로 대행시킬 수 있었으나 본래의 취지에서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법적으로 왕의 친림을 명시해서 그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였다.

한편 관무재는 왕이 친림하여 무재를 관람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건국초부터 왕의 참석 하에 무재를 시험 보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관사(觀射)라고 하였다. 그런데 연산군대 관무재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관련 기록이 부족해서 관사와 관무재가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못하였다. 중종대부터 관무재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당시에는 고위 무관이나 무과로 진출하는 통로로 기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무사의 필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한 추세에 힘입어 춘당대관무재(春塘臺觀武才)라는 이름으로 무과의 한 종류로 자리 잡았다. 이때 본래의 취지에 따라 왕이 친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후기에 이르러 더욱 정비되면서 관무재로 불리었으며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시험이 실시되도록 하였다. 초시는 지방에서 실시되었으며 이에 합격해야 서울로 올라와서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결국 왕이 관무재 복시에 친림하는 것으로 『속대전』에 규정됨으로써 본래의 취지를 살렸다. 그러므로 친림무과라고 하는 것은 『속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알성시와 관무재 복시의 두 종류만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과 시험에 왕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원래의 설치 취지를 살리고자 특별히 알성시와 관무재 복시에 대하여 ‘친림’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이었다.

내용

『속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알성시 무과는 왕이 문묘에 친림해서 작헌례(酌獻禮)를 마친 뒤에 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초시와 전시의 제법규는 정시(庭試)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시의 규정은 보면 별시(別試)와 같다고 하였다. 결국 별시와 같은 내용으로 거행되었다.

이에 초시와 전시 2단계로만 시험이 실시되었다. 초시는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어 각각 2품 이상의 문관 1명, 무관 2명, 당하관(堂下官) 문관 1명, 무관 2명을 시관으로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또 양사(兩司) 관원 각각 1명으로 감시(監試)하게 하였다. 이는 부정행위를 적발하고 감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험 과목은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관혁(貫革)·격구(擊毬)·기창(騎槍)·조총(鳥銃)·편추(鞭芻)·강서(講書)의 11가지였다. 다만 그중에서 왕의 낙점을 받아 2가지나 3가지를 택하여 시험하거나, 혹은 점수와 적중된 화살의 수를 계산하여 뽑도록 하였다. 응시자가 서울로 와서 시험을 치르는 것도 똑같았다. 알성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합격자 수만 틀렸는데, 양쪽 시험장에서 각각 50명씩 뽑았다.

전시에는 왕이 친림한다는 규정이 명기되었는데, 이것이 알성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 과목은 초시와 같았다.

한편 관무재 복시에 관한 규정을 보면, 왕이 친림하여 시사(試射)할 때는 2품 이상의 문관 1명, 무관 2명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임명해서 4가지 과목으로 시험을 보았다. 외처(外處)에서 실시하였을 때에는 의정(議政) 1명을 명관(命官)으로 삼아 조총과 편추로 시험을 보았다. 참시관은 친림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임명하였다. 또 왕의 어좌 좌우에 각각 2품 시험관 2명을 임명하여 보내 검과 창 등의 기예로 살수(殺手)를 시험하게 하였다.

무신의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 금군(禁軍) 별장(別將), 호위청(扈衛廳) 별장(別將), 금군장(禁軍將), 오위장(五衛將), 내승(內乘), 별군직(別軍職), 병조 당상군관(兵曹堂上軍官), 오군문(五軍門)의 중군(中軍) 이하 제장교(諸將校), 선전관(宣傳官), 무겸(武兼), 도총부낭청(都摠府郎廳), 서북부료군관(西北付料軍官), 제주부료자제(濟州付料子弟)는 모두 초시를 면제하고 복시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되 4가지 과목을 모두 시험 보도록 하였다. 반면에 초시에 합격했던 사람은 단지 그 합격한 과목으로 복시를 치르게 하였다.

한량(閑良)의 경우 합격자는 바로 전시에 응시하게 하되 용호방(龍虎榜), 즉 무과 합격자 명단이 갖추어지면 그날로 방방(放榜)하게 하였다. 그다음의 성적을 거둔 자는 상(賞)을 논하도록 하였다. 출신(出身), 즉 전에 무과에 합격하였던 자 이상이라면 유엽전을 3발 명중시켜 4푼(分)의 점수를 획득한 사람은 수령이나 변방 장수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우등(優等)으로 합격한 자는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그다음의 성적을 거둔 자는 상을 논하였다. 그러나 편추와 살수의 기예에 대해서는 사제(賜第)는 없게 하였다. 즉, 급제자와 같은 자격을 부여하지 않도록 하였다.

변천

『속대전』 편찬 이후 알성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관무재 복시에 관한 규정이 바뀌어 『대전통편』에 실렸다. 즉, 전시에 친림하였을 때 참시관으로 2품 이상 문무관 각각 1명, 그리고 3품 이하의 참고관(參考官)으로 당상 무관 1명과 당하 문관 1명, 무관 2명을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즉, 왕이 친림하였을 때 시험관에 관한 규정을 수정해서 수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중앙의 삼군영(軍營)에 소속된 권무군관(勸武軍官)을 대상으로 왕의 특별 하교가 있을 때 실시하는 권무과(勸武科)라는 시험이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1704년(숙중 30)에 처음 나오는데(『숙종실록』 30년 4월 29일), 이때 최초로 실시되었던 것은 아니고 1670년(현종 11) 어영청(御營廳)에 선무군관을 설치한 이후 비로소 시행되었을 것이다. 1706년(숙종 32) 금위영(禁衛營)에, 1717년(숙종 43) 훈련도감(訓鍊都監)에 권무군관을 두었는데, 이들에게는 급료도 없었고 근무에 따른 승진 규정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에 특별히 그들을 대상으로 권무과를 가끔 실시하여 전시에 직부(直赴)하는 혜택을 부여하고 권장하였다.

그런데 1781년(정조 5)에 왕이 무과 가운데(중) 폐단이 권무과보다 심한 것이 없다며 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하고(『정조실록』 5년 4월 10일), 그 직후에 실시된 권무과에 친림하였다(『정조실록』 5년 4월 25일). 이를 계기로 권무과는 정식으로 무과에 편입되었고, 마침내 새로 간행된 『대전통편』에 오르게 되었다. 법제화되면서 그 위상이 분명해졌다.

초시와 회시는 없으며 특교(特敎)로 인하거나 친림하여 실시하는데, 합격자는 전시에 직부하도록 하였다. 삼영(營)에 소속된 권무군관이 응시하는데, 시관으로는 대신 1명, 2품 이상 문무관 각각 1명, 당하관 문무관 각 1명을 임명하여 보냈다. 친림하였을 때에는 임시로 간혹 군문(軍門) 도제조(都提調), 대장(大將), 천·파총(千把摠), 무종사관(武從事官)을 차출하였다. 시험 과목으로는 목전·철전·유엽전·편전·기추·관혁·격구·기창·조총·편추·강서에 이르는 11가지 중 왕에게 품의하여 그중에서 낙점을 받은 것으로 정하였으니, 별시와 동일하였다. 이것으로 권무과는 법적으로 체계화되면서 정식 무과에 속하게 되었으며 본래의 의도를 살려 왕이 친림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큰 변화가 없었으며, 1894년 과거제가 혁파되면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무과총요(武科總要)』
  • 윤훈표, 「조선초기 무과제도연구」, 『학림』 9, 1987.
  • 이성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한국사 23-조선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의 직부전시」, 『군사』 31, 1995.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