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금록(靑衿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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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청금록 |
한글표제 | 청금록 |
한자표제 | 靑衿錄 |
분야 | 기록서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성낙수 |
권책수 | 1권 1책 |
소장처 | 원광대학교 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금록(靑衿錄) |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특정 지역에서 시행된 지방자치 규약을 수록한 책.
개설
『청금록(靑衿錄)』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특정 지역에서 시행된 지방자치 규약을 수록한 책이다. 대표적으로 왕실의 창업지인 함경도 일대에서 시행된 지방자치 규약을 수록한 것이 있다. 조선 시대 성균관ㆍ사학(四學)ㆍ향교ㆍ서원 등에 비치되어 있는, 유생(儒生)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다. 이 책에는 유학(幼學)ㆍ생원ㆍ진사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조관(朝官)으로 있는 자도 해당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청금(靑衿)은 청색의 영(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래는 거자(擧子)들이 입는 옷을 뜻한다. 후대에 사자(士子)들을 청금이라고 호칭한 것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평민을 지칭하는 백포(白布)와 대비하여, 사자들을 ‘청금’이라 호칭하였다.
『청금록』은 『향신록(鄕紳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를 운영하던 향중사류(鄕中士類)들의 명부다. 이는 향신록(鄕紳錄)ㆍ향좌목(鄕座目)ㆍ향적(鄕籍)ㆍ향록유안(鄕錄儒案)ㆍ향목(鄕目)ㆍ청금록(靑衿錄) 또는 사적(士籍)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대개 세족(世族)ㆍ현족(顯族)ㆍ우족(右族) 등으로 불리는 재지사족(在地士族)들만이 입록될 수 있다. 또한, 향안에 입록되어야 비로소 양반으로서의 대우는 물론, 좌수(座首)ㆍ별감(別監)의 향임에도 선출되고, 지배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향권을 장악한 재지사족들로서 대개 고려 말 첨설직을 받은 전함품관(前銜品官)이나, 또는 조선개국 시 처음부터 훈신(勳臣) 계열에 들지 않고, 조상 전래의 세거지에 토착해 경제적ㆍ문벌적으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권력에 대립해온 부류들이었다.
서지 사항
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31.4cm 가로 20.2cm이며, 원광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체재는 대체로 관직ㆍ성명ㆍ본관ㆍ자ㆍ호ㆍ생년간지와 누구의 아들이나 아우 또는 손자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름만 기록해 놓은 것도 있다. 입록 자격으로서 친족은 물론, 처족과 외족까지 포함된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반드시 문벌세족이어야 하였다. 그리고 가계는 물론, 본인에게도 아무런 허물이 없어야 되고, 품행이 뛰어나야 하였다. 허물이란 본인 및 내외족계 안에 천계(賤系) 또는 범죄 흔적을 말한다.
입록 절차는 향원(鄕員)들이 추천을 하면 충분한 토의를 거친 다음 권점(圈點)을 통해 가부를 결정하였다. 지역에 따라 만장일치의 순가(純可)에서부터 1ㆍ2ㆍ3부(否)의 네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권점을 거치는 것은 아니고, 향인이 모두 존경하는 사족은 바로 입록되는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허물이 있는 자를 사정(私情)에 얽매여, 잘못 추천했을 경우 추천인도 함께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부권점의 과정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는 자료가 밀양의 『향헌(鄕憲)』이다.
추천 시기는 대개 춘추의 강신일(講信日)에 행했고, 나이는 25∼30세 이상이라야 하였다. 이때 입록되는 사람은 대개 입록례(入錄禮)를 치른 후 비로소 좌목(座目)에 기록된다.
의의와 평가
이러한 향안이 작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대체로 유향소 성립시기와 같이 한다고 보며, 자료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패향좌목(沛鄕座目)』다. 이른바 『향헌』에 실려 있는 이 좌목은 태조 출생지인 풍패현(豊沛縣: 지금의 함흥)의 향안이다. 여기에 실린 인물은 이 지방의 출신자만이 아니라, 개국공신, 이 지방과 연관성이 있는 자, 세종 때 중신, 세조공신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재지사족들의 향권 장악이라는 사실과 관계없이, 다만 태조 출생지에 대한 존엄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향안이 재지사족들의 권익옹호와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은 지방통제가 강화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향안은 임진왜란 때 거의 타버려, 현존하는 것은 전부 난 이후 재작성 된 것들이다. 이것은 난중에 향안의 소실로 향촌사회의 질서가 크게 무너지자, 새로운 질서회복의 요청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 구안(舊案)을 수정하면서, 인물의 첨삭이 가해졌고, 그 뒤 극심한 신분상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추록(追錄)의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또한 당쟁과 서얼허통(庶孽許通)의 영향도 향안의 성격변화에 크게 작용하였다. 즉 한 번 향안에 오르면, 자자손손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고, 특히 서북지방의 경우는 군역까지 면제받았기 때문에 입록을 둘러싸고 향인 간에 쟁투가 심하였다. 심지어는 향임을 매매하는 폐단까지 발생해 영조ㆍ정조 이후 향안 수정이 수령들의 합법적인 수탈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향전(鄕戰)은 향외인(鄕外人)과 향원간, 또는 향원상호간의 문벌싸움이 대부분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입록에 불만을 품고, 향안을 세파(洗破)해 버린 순천의 경우, 향안 수정에 불만을 품고, 이에 참여한 인물을 죽인 함흥사건, 향안을 태워 버린 인동(仁同)의 경우, 무식무치(無識無恥)한 무리가 향적을 가문을 일으키려는 도구로 삼아 싸움이 치열한 끝에 마침내 향적이 재분(再焚)된 남원의 경우 등은, 당시의 사회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학계에 알려져 있는 향안은 경상도 12개, 충청도 2개, 전라도 1개, 함경도 1개 등 도합 16개 정도이다.
참고문헌
- 강창룡, 「17ㆍ18세기의 제주향촌사회구조와 그 성격-제주향안과 천기(薦記)를 중심으로-」, 『제주도연구』 8, 제주도연구회, 1992.
- 김인걸, 「조선후기 향안(鄕案)의 성격변화와 재지사족」,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김철준박사화갑기념논문간행위원회, 1983.
- 김호일, 「조선시대 향안(鄕案)에 대한 일고찰」, 『한국사학』 9, 한국사학회, 1987.
- 신정희, 「향안(鄕案) 연구」, 『대구사학』 26, 대구사학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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