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공신(定運功臣)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선조 말·광해군 초에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을 탄핵하여 숙청한 공로로 광해군대에 책봉된 공신.

내용

임진왜란 초반의 패전을 책임지고 세자 광해군에게 전위하라는 여론이 높아 가면서 선조와 세자 광해군 사이에 갈등이 커졌다. 이런 상황은 1600년(선조 33) 6월에 중전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1602년(선조 35)에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선조는 영의정유영경을 통하여 친위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세자 광해군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소외시켰다.

이런 중에 1605년(선조 38) 영창대군이 출생하였다. 영창대군이 3살이 되던 1607년(선조 40) 10월 9일 선조가 졸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놀란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전위하려 하였으나 영의정유영경이 반대하여 취소되었다. 불안해진 세자 광해군 쪽 사람들은 정인홍을 설득하여 유영경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지만 격노한 선조가 정인홍 및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이이첨·이경전을 귀양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귀양이 결정된 지 나흘 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상황은 반전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지 한 달 만인 1608년 3월에 유영경은 함흥으로 유배 갔다가 반년 후인 9월에 자진을 명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 6월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1613년(광해군 5) 5월에는 유영경을 탄핵, 숙청한 공로자들을 대상으로 정운공신 10명이 책봉되었다. 1등은 수성결의분충효절정운공신(輸誠結義奮忠效節定運功臣)이라 하였는데 이산해·정인홍 2명이었다. 수성결의분충정운공신(輸誠結義奮忠定運功臣)이라 불린 2등은 이이첨·이성 등 5명이었고 수성결의정운공신(輸誠結義定運功臣)이라 불린 3등은 3명이었다. 정운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

용례

輸誠結義奮忠效節定運功臣 二等減效節二字 三等減奮忠效節四字 一等二人 二等五人 三等四人(『광해군일기』 5년 3월 12일)

참고문헌

  •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