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알(展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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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묘(殿廟)나 능원(陵園)에 행차하여 배례(拜禮)하며 예를 표하는 의식.

개설

전알은 사당이나 능원에 행차하여 알현하는 의식이다. 정해진 시간에 성대한 절차로 이루어진 제사의 복잡함과 규범적인 것에서 벗어나 보다 쉽게 조상이나 성현을 만나는 형식이 전알이다. 전알은 희생이나 제물을 별도로 준비하지 않으며 절을 올리는 배례만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알을 수행하는 목적은 다양하다. 사당의 관리 상태를 살피기 위해 행차할 때나 지나가는 길에 들러 인사할 때도 전알의 예를 행하였다. 특히 전알은 조선후기 왕이 종묘(宗廟), 영희전(永禧殿), 경모궁(景慕宮), 궁묘(宮廟), 능원 등을 수시로 찾는 의식으로 자주 등장하였다. 그리고 종묘의 경우 전알이 정례화(定例化)되기까지 하였다. 숙종은 1687년(숙종 13)에 새해에 종묘에 전알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숙종실록』 13년 11월 11일). 그리고 1702년(숙종 28)에 숙종은 설날에만 전알하는 것 역시 미안하다며 전알을 1년에 봄과 가을 2차례 거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숙종실록』 28년 7월 9일). 이후 영·정조대에도 봄과 가을의 종묘 전알은 정례화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왕이 직접 제향을 올리지 않고 신하가 대신 진행할 때는 전날 전알하고 제사에 쓰일 제기를 살피는 성생기(省牲器)만을 행한 뒤 궁궐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후기 전알이 왕실 의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민간에 사당이 널리 보급된 것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사당은 사시제(四時祭), 속제(俗祭), 기제(忌祭) 등의 제사 공간으로만 나오지 않는다. 주인은 새벽에 일어나면 사당에 나아가 인사를 하고, 출입할 때에도 사당에 고하였다. 관례와 혼례 때에도 사당에 참예하는 의식이 있었다. 조선후기 사대부가에 사당이 확산되면서 그곳에서의 의식 역시 다양해졌다. 제향이 아니라 배례(拜禮)로서 정성을 보이는 알현의 의식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조선후기 종묘나 진전, 궁묘 등에 알현을 위한 왕의 행차가 늘어난 것은 이러한 조선후기 유교 문화의 반영이었다.

절차 및 내용

전알은 배례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의식이다. 종묘의 예를 들면 전알은 종묘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판위로 나아가 국궁(鞠躬) 4배(拜)를 행하였다. 그리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제1실부터 각 신실을 봉심한 후 돌아가는 절차로 되어 있다. 왕릉의 경우엔 홍살문 안쪽 판위에서 국궁 4배 후 능으로 나아가 봉심하고 돌아갔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
  • 『춘관통고(春官通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