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李承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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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수비를 담당하였던 명나라의 관료.

개설

홍치 연간(1488~1505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부(工部) 낭중(郎中)을 지냈고 남창(南昌)의 지부(知府)가 되었다. 뒤에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로서 요동을 순무하여 도망자들을 달래어 포섭하고 둔전을 개간하였으며 성보를 수축하여 변방의 방어를 다졌다. 1531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얼마 후 병사하였다.

활동 사항

1511년 군병을 지휘하여 강서성 공주(贛州) 등지의 농민기의(農民起義)를 진압하였다. 뒤에 우부도어사로서 요동을 관리하면서 둔전을 개간하였으며 성보를 수축하여 변방의 방위를 공고히 하였다. 뒤에 형부(刑部) 상서(尙書)로 발탁되었고 다시 병부(兵部) 상서(尙書) 겸 좌도어사로서 군무를 담당하였다. 1531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얼마 후 병사하였다. 세종이 애도하여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하고 강혜(康惠)라는 시호와 함께 백금과 비단 및 양식을 내렸다.

이승훈은 광녕도어사를 지내는 동안 오가는 사은사를 통하여 조선에 알려졌다. 광녕(廣寧)은 광녕위(廣寧衛)를 가리키는데 관청은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북녕시(北寧市)에 위치하며 요동도사에 속한다. 명대에 광녕은 동북 지역의 최고 군사 기관이 주둔한 곳으로 요동총병부가 이곳에 있어 몽골과 여진을 방어하는 요충지였으며 외교사절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광녕도어사를 지내는 동안 조선과 중국 사이의 외교 업무에도 상당한 관심과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중종실록』 17년 5월 21일).

참고문헌

  • 張作耀·蔣福亞·邱遠猷 等 主編, 『中國歷史辭典』, 國際文化出版公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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