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녀(義子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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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모(前母)에게 있어 계모(繼母)의 자식, 그리고 계모에게 있어 전모의 자식.

개설

의자녀는 혈연이 아니라 의(義)로 맺어진 자식을 의미하는데, 죽은 전모 입장에서 볼 때 계모가 낳은 자식을, 계모 입장에서 볼 때에는 죽은 전모가 낳은 자식을 말한다. 의자녀와 어머니 측 본족(本族)과의 재산상속 분쟁 등에서 의자녀의 상속권이 점차 강해지면서, 조선후기로 올수록 그들의 가계 내의 위상이 높아졌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가계 구조를 살펴보면 출산이나 출산 후유증으로 인한 여성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남성들은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제2, 제3의 처를 취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많은 의자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초취(初娶) 부인이 사망한 후 후처(後妻) 소생이 태어나면 이들은 죽은 초취 부인에게 의자녀가 된다. 또 반대로 초취 부인이 자식을 낳고 사망한 후 후처가 들어오면 그 자식들은 후처에게 의자녀가 된다. 즉 여성과 자식 사이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유교적 의리로 맺어졌다는 의미이다.

보통 의자녀에 관해서는 이들이 전모나 계모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과 봉사(奉祀)의 의무를 갖는가와 관련한 논의가 많이 있어 왔다. 특히 조선초기부터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전모의 재산과 제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자식 없이 일찍 사망한 여성은 남편 입장에서는 무자녀망처(無子女亡妻)로, 부모 입장에서는 무자녀망녀(無子女亡女)로 지칭된다. 이들의 재산을 친정으로 되돌려야 하느냐, 시가(媤家)에서 차지하느냐의 논의이다. 이때 친정으로 되돌리는 것은 망처의 본족에게 귀속된다 하고, 시가에서 차지할 때 그 대상은 의자녀가 된다. 결국 본족과 의자녀의 상속권과 그 추이는 조선시대 가족 및 친족 질서의 실상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고 하겠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자식 없이 죽은 자의 재산은 그 배우자가 소유하다가 배우자마저 죽으면 본족에게 되돌려 주게 되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무자녀망처의 재산을 모두 본족에 돌려주지 않고 그중 3분의 1을 승중의자(承重義子)에게 주는 조항이 생겼다(『세종실록』 24년 7월 16일).

『경국대전』에 오면 자녀가 없는 전모·계모의 재산은 의자녀에게 5분의 1을 주고, 승중자(承重子)에게는 3분(分)을 더 주도록 규정하였다. 자녀가 있는 전모나 계모의 경우, 일반 의자녀는 제외하고 승중자에 한해 9분의 1의 재산을 주었다. 특히 승중의자의 경우 3세 전 입양된 수양자와 함께 친자식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이들의 가계 내의 위상이 매우 높아짐을 알 수 있다.

명종대에는 수교를 통해 의자녀가 전모·계모의 재산을 기한 없이 사용할 것과, 신노비(新奴婢)와 그 소생은 본족에게 일절 주지 말고 의자녀에게 전부 지급하라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이처럼 조선중기 이후 유교적 예제(禮制) 질서의 정착 과정에서 승중의식 내지 부계 친족 의식이 강화되면서 봉사자 내지 승중의자의 입지가 강화되어 무자녀망처의 재산도 의자녀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법 해석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사송유취(詞訟類聚)』
  • 『수교집록(受敎輯錄)』
  • 朝鮮總督府 中樞院 調査課 編, 『李朝の財産相續法』, 朝鮮總督府 中樞院, 1936.
  • 문숙자, 「의자녀(義子女)와 본족(本族) 간의 재산 상속 분쟁: 1584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나주목판례(羅州牧判例) 분석」, 『고문서연구』8, 1996.
  • 문숙자, 「조선 전기 무자녀 망처(無子女亡妻) 재산의 상속을 둘러싼 소송 사례」, 『고문서연구』5,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