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사(圓城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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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대에 대장경을 요청한 일본 나라시의 진언종 사찰.

개설

원성사(圓城寺)는 8세기 감진(鑑眞) 화상(和尙)이 창건했다는 설과 11세기 명선(命禪) 화상(和尙)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481년(성종 12)에 막부의 특사 자격으로 온 승려 영홍(榮弘)은 대장경 1질과 원성사 불사를 위한 비용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대장경 1질과 원성사 불사 자금으로 면포(緜布)와 정포(正布) 등을 하사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절의 연혁

이 사찰은 진언종(眞言宗) 어실파(御室派)이며, 원래는 옛날 나라(奈良)의 동쪽 교외에 있던 북대화오산(北大和五山) 중의 하나였다. 북대화오산이란 인욕산(忍辱山) 원성사(圓成寺), 보리산(菩提山) 정력사(正曆寺), 녹야원(綠野園) 범복사(梵福寺), 서다림(誓多林) 만복사(萬福寺), 대자산(大慈山) 약사사(藥師寺)를 가리키며, 대부분 평안시대(平安時代)에 창건되었다. 현재 원성사와 정력사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사찰은 빈 터만 남아 있다.

원성사는 756년에 성무상황(聖武上皇)과 효겸천황(孝謙天皇)이 발원하고, 감진 화상의 제자인 당나라 승려 허롱(虛瀧) 화상(和尙)이 개창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허롱 화상의 실존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있고, 법당의 내영도(來迎圖)가 그려진 기둥에 ‘당사개산명선대화상(當寺開山命禪大和尙)’이라는 글씨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11세기 초 명선 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본다. 명선 화상은 1026년에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을 안치한 인물이다.

(2) 조선과의 인연

평안시대(平安時代)부터 겸창시대(鎌倉時代)에 걸쳐 원성사에는 많은 당우(堂宇)와 존상(尊像)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466년 응인(應仁)의 난 때 병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주요 건물을 비롯하여 많은 당우들이 소실되었다. 이때 원성사의 말사에 해당하는 지은원(知恩院)의 주지로 있던 영홍이 중심이 되어 재건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홍은 1481년(성종 12)에 강호막부(江戶幕府)의 제8대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의 특사 자격으로, 국서 전달 및 장군의 특별 요청품을 구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영홍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왕에게 바치고 족리의정의 요청품인 대장경 1질과 원성사 불사를 위한 비용을 요청하였다(『성종실록』 13년 4월 9일). 이에 왕은 대장경 1질을 주고, 1468년 약사사 불사에 조연(助緣)한 예에 따라 면포(緜布)와 정포(正布) 각각 2,000필과 면주(緜紬) 500필을 하사하였다. 영홍은 조선에서 하사받은 불사금과 일본 조정으로부터 받은 토지 105석을 가지고 원성사를 재건하여, 1487년에는 14개의 당우가 중수되었다. 이후 원성사는 강호막부(江戶幕府)가 붕괴되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된 1868년 이후 쇠퇴되었으나 20세기 이후 중수를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화주인욕산원성사연기(和州忍辱山圓成寺緣起)』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의 대장경구청과 한일간의 문화교류」, 『한일관계사연구』17, 2002.
  • 相賀徹夫 著, 『探訪日本の古寺』12: 奈良三, 東京: 小學館, 1980.
  • 宇佐見英治, 田畑賢住 著, 『古寺巡禮 奈良2: 圓成寺』, 京都: 淡交社,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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