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련보(玉蓮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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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부령도호부에 속한 만호진(萬戶鎭).

개설

옥련보는 함경북도 부령도호부에 속했던 관방시설이다. 1488년(성종 19)에 성을 처음 쌓았다. 숙종대에는 폐무산(廢茂山)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옥련보는 남쪽으로 어유간진(魚游澗鎭)과 3식(息) 10리(약 40㎞)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부령진(富寧鎭)과 45리(약 17.7㎞) 거리에 있다. 무산보(茂山堡)와는 90리(약 35.4㎞) 떨어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에 따르면 관아의 남쪽 60리(약 23.6㎞)에 있다고 한다. 김성일(金誠一)의 『북정일록』에 따르면 옥련보는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서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령에서 옥련령(玉蓮嶺)을 넘으면 옥련보가 나온다. 옥련보는 북봉봉수(北峯烽燧)를 관할하였으며 북쪽으로는 허통동봉수(虛通洞烽燧)와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최달동봉수(崔達洞烽燧)와 연결되어 있었다.

변천 및 현황

옥련보는 1488년(성종 19) 3월에 쌓았다. 성의 높이는 13척(약 4m), 둘레는 2,435척(약 738m)이었다(『성종실록』 19년 3월 29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옥련보가 고립되어 있다는 이유로 옮겨서 설치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영안도관찰사 이봉(李封)은 변진을 변경하는 일은 전처럼 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맞섰다(『성종실록』 19년 10월 9일).

옥련보를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는 1493년(성종 24)에도 제기되었다. 영안도관찰사 성준(成俊)과 북도병마절도사 원중거(元仲秬) 등은 옥련보를 부령진의 아래 10여 리 거리에 있는 허통동(虛通洞)으로 옮기자고 했다(『성종실록』 24년 10월 6일). 『제승방략』에 따르면 옥련보에는 토병(土兵)이 53명이고, 남쪽 지방에서 부방하는 군사가 50명이었다. 『여지도서』와 『만기요람』에 따르면 처음에는 만호를 두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폐무산으로 옮겨 설치했다.

현재 함경북도 부령군 석막로 동자구 남쪽 산기슭에 있다. 석막노동자구의 서쪽 형제리와의 경계에 있는 포령산에 위치해 있는데,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석성이라고 한다.

형태

옥련보의 높이는 13척(약 4m), 둘레는 2,435척(약 738m)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인 옥련보의 둘레가 1,033척(약 313m), 높이가 5척(약 1.5m)이라고 했다. 병마만호 1명을 두었다.

『제승방략』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4,442척(약 1,346m)이며, 여장(女墻)이 68곳이고, 옹성(甕城)이 2곳이며 곡성(曲城)이 5곳이었다. 동문과 서문이 있었으며, 천정(泉井)은 1곳 있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돌로 쌓은 성의 둘레는 1,482척(약 449m)이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옥련보는 석축으로 둘레는 1,480척(약 448.5m)이라고 했다.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석성인 옥련보성의 둘레는 1,300m이며, 서쪽과 북쪽으로는 산을 등지고 동남쪽은 평지이다. 성의 평면은 6각에 가까운데 남문과 동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는 80m 정도의 성터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북정일록(北征日錄)』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평화문제연구소 편, 『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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