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현(牙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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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아산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아산현(牙山縣)은 조선시대 충청도에 속한 현이다. 조선전기에는 청주목, 조선후기에는 홍주목의 관할이었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설립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482호, 인구가 1,822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7명, 진군(鎭軍) 55명, 선군(船軍) 250명이었다. 토지는 6,566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반 이상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아산군으로 승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아산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음봉현(陰峯縣)으로 고치고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면 지역인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음봉현은 음잠(陰岑)이라고도 불렸다. 고려 건국 초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인주(仁州)로 고쳤고,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성종대에 읍호를 영인(寧仁)으로 고쳤고, 1005년(고려 목종 8)에는 자사를 폐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임내로 두었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이 되어서야 아산현이 되었고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을 수령으로 파견하는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를 보면 관아에 관직은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인, 향리 12명, 가리(假吏) 14명, 지인 17명, 나장 15명, 관노 10명, 관비 9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1459년(세조 5)에 아산현을 폐지하여 온양현·평택현·신창현의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세조실록』 5년 1월 23일), 1465년(세조 11)에 복구하였다(『세조실록』 11년 9월 5일).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로 이속(移屬)시켰던 것을 1506년(중종 1)에 환원시켰다. 조선후기에는 11개 면으로 구성되었으며 홍주목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따르면 3,965호, 남자 6,808명, 여자 10,630이었다. 토지는 밭 989결 65부 9속, 논 1,615결 81부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아산군으로 승격하였다. 1900년(고종 37)의 『아산군양안(牙山郡量案)』에 의하면 민호 4,220호, 토지 3,399결 1부 3속이었다. 1914년에 온양군, 신창군(新昌郡)을 병합하여 확대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아산현읍지(牙山縣邑誌)』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