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沁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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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강화도에 설치하였던 진무영 등의 군영을 달리 이르는 말.

개설

강화도는 서해 수도(水道)의 요충이며 도성의 병한(屛翰)이라고 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강화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심영(沁營)이라는 용어도 그 와중에서 탄생하였다. 1231년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를 피난처로 이용한 이후 강화도는 심도(沁島), 심부(沁府), 심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심영은 말 그대로 강화도의 군영을 의미한다. 강화도는 조선전기부터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 주둔지였지만 중심처는 아니었다. 조선전기의 강화도 수군은 남양 화량진(花梁鎭)의 정3품 수군절도사의 휘하에 있었다. 강화도 육군은 진관 체제에 따라 장단진관(長湍鎭管)에 소속되었다. 그런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는 도성을 방어하는 곳이면서 왕실이 도피할 수 있는 보장처(堡障處)로서 중요도가 부각되면서 그 지위가 변화되었다.

인조대부터 강화도의 수비 체제를 보강하고 남한산성과 기각을 이루는 보장처로 정비하였다. 인조는 정묘호란 직후 강화도를 유수부로 승격시켜 행정적 독립 기구로 만들었다. 또한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御使)를 강화도에 두어 경기, 충청, 황해의 삼도 수군을 지휘하는 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하였다. 동시에 인조대와 효종대에는 경기도 서남부 해안과 주변의 진보(鎭堡)들이 강화도 인근으로 이속되었다. 숙종대에는 해방론(海方論)이 강조되어 강화도의 수비 체제를 강화하였다.

숙종대에는 심영을 갖추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1678년(숙종 4)에 숙종은 강화유수가 진무사(鎭撫使)를 겸하게 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는 강화부에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였다. 1779년(정조 3)에는 진무영에 통어영을 병합하였다.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 이후 심영의 육군과 수군 지휘 및 동원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기전(畿甸)을 방위할 수 있는 해로(海路)의 인후(咽喉)였다. 특히 두 차례의 호란을 전후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연해의 읍과 도서들에 진을 설치하는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강화도는 1627년(인조 5) 유수부로 승격되어 수도권 방어 체제에서 서쪽 해안을 방어하는 중심 보장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정치적,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강화도에는 군사 기지가 많이 설치되었다. 강화도 연안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보를 많이 설치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인화보(寅火堡)·철곶보(鐵串堡)·승천보(昇天堡)·월곶진(月串鎭)·제물진(濟物鎭)·용진진(龍津鎭)·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초지진(草芝鎭)·선두보(船頭堡)·장곶보(長串堡)·정포보(井浦堡) 등이다.

효종대에는 남양만의 수군 방어 체제를 강화도로 이설하기 시작했고,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강화도에 진무영을 설치하면서 새로운 서해안 방어 체제를 완성하였다. 1678년(숙종 4)에는 강화유수가 진무사를 겸하면서 진무영 설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성을 둘러싼 수도권 방어 체제를 총융청, 수어청, 진무영으로 정비한 것이다. 그 뒤 10여 년간에 걸쳐 강화도 각 속읍의 정비와 군비의 확보 등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700년(숙종 26)에 강화부에 심영이라고 할 본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고종대까지 심영은 수도를 방어하고 각 지방의 변란을 진압하는 군대의 역할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심영은 강화유수 휘하에 중군(中軍)이 담당한 강화 본영, 전영(前營)인 부평부사(富平府使), 좌영(左營)인 통진부사(通津府使), 우영(右營)인 풍덕부사(豊德府使), 후영(後營)인 연안부사(延安府使)가 있었다. 심영의 조직은 영 체제의 시대 변화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강화유수가 겸한 종2품의 사(使), 정3품의 중군(中軍) 1명, 정3품의 진영장(鎭營將) 5명이 지휘부를 이루었다. 여기에 충청도 12개 읍이 소속된 해미(海美)의 별중영(別中營)이 더해졌다. 강화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와 황해의 연해읍이 하나의 방어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변천

정조 즉위 초에 강화유수에게 경기수사와 삼도통어사를 겸임시켜 수군 및 육군을 지휘하게 하고 교동현감을 부사로 승격시켜 방어사를 겸하게 한 다음 안흥진(安興鎭)을 수사의 행영(行營)으로 삼았다(『정조실록』 3년 3월 8일).

고종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의 군사 제도를 참고하여 중앙의 군제를 친군영제(親軍營制)로 재편하였다. 또한 지방군도 친군영제에 따라 1885년(고종 22년)에 평양감영을 친군서영(親軍西營)으로, 1887년(고종 24)에 경상감영을 친군남영(親軍南營)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강화도의 심영은 친군심영(親軍沁營)이 되었는데, 500명 정원이었다. 심영의 재정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부평의 해방영납(海防營納)과 통진의 포량미(砲糧米)를 심영에 환납(還納)하도록 했다.

고종대에는 심영군이 지방의 변란 진압에 동원되었다. 1893년(고종 30)에는 내무부의 요청에 따라 심영 병정 300명을 수원에 주둔시켰다(『고종실록』 30년 3월 28일). 1894년(고종 31)에는 동학농민군의 진압군으로 동원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자 경군 대장이었던 홍계훈이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5월 19일 친군전영(親軍前營)과 좌영의 군사들인 장위병(壯衛兵) 300명과 심영병 500명이 파견되어 진압에 동원되었다. 심영병은 동학군 진압에 성과를 거두어 전주에 주둔하였고(『고종실록』 31년 5월 16일), 동학군 지도자 중의 한 명인 김개남(金介男)을 체포하여 죽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1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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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성수, 「肅宗初 江華島 墩臺의 축조와 그 의의」, 『조선시대사학보』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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