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瀋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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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 요령성의 도시.

개설

심양은 심주(瀋州)·성경(盛京)·봉천(奉天)으로도 불리었다. 심양은 고대에는 고조선· 고구려의 땅이었다. 발해시대에는 심주(瀋州)로 불리었으며 명대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 소속 25위(衛) 중 심양위(瀋陽衛)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명 후기 후금(後金)의 점령으로 후금의 임시 수도가 되면서 고궁 등 궁전을 건축하였고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다. 현재는 중국의 10대 도시 중의 하나이다.

명칭 유래

심양이라는 명칭은 이미 원나라 시기에 나타났다. 요금시대에 심양을 심주라고 불렀다. 원대에는 행정구역의 제도가 로(路)·부(府)·주(州)·현(縣)제였는데 심양은 심양로(瀋陽路)에 해당하였다. 명나라 시기에는 심양중위(瀋陽中衛)가 설치되었다. 심양의 남쪽으로 혼하(渾河)가 흐르고 있는데, 소요수(小遼水)라고도 불리었다. 이 혼하는 남으로 흐르다가 요양을 거치는 태자하(太子河)를 만나고 다시 요하와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갔다.

몽고는(몽골은)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요동을 점령한 이후 귀부한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심주성(瀋州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다시 심양로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하고 심주를 통치하였다.

1261년(원 세조 2) 원은 홍다구가 다스리던 고려군민만호부를 안무고려군관총관부로 변경하고 요양고성을 다스리도록 하여 고려가 심주와 요양고성을 다스렸다. 심양이라는 명칭은 심주(瀋州)의 심(瀋), 요양(遼陽)의 양(陽)을 따서 심양(瀋陽)이라는 명칭이 나왔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자연 환경

심양은 요하평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요하의 지류인 혼하의 북쪽, 송요평원(松遼平原)의 남쪽으로, 동경 123.27도, 북위 41.44도 사이에 위치하고 서북쪽으로는 몽골 지역과 인접하였다. 주위 지세는 평야지대이며 요하를 접하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토질 역시 비옥하였다. 심양은 요하와 혼하가 만들어 낸 충적평야를 가지고 있었다. 육로교통으로 보자면 산해관(山海關)으로 직통하여 북경(北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심양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고대 연나라 때는 요동군(遼東郡), 한나라 때는 후성(侯城), 요금시대에는 심주(瀋州), 원대에는 심양로(瀋陽路), 명대에는 심양위(瀋陽衛) 등으로 불리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양을 점령한 후 누르하치[奴爾哈赤]의 전략적 목표는 요동의 역량을 요서(遼西) 지역으로 확대하여 산해관을 넘는 것이었다. 심양은 그들의 초기 중심지인 신빈(新賓)·흥경(興京) 등과도 신속히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후금이 초기 수도 요양을 버리고 심양을 다시 수도로 삼았던 것은 심양이 이러한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심양은 요하로 흘러드는 혼하를 끼고 있는데, 요하는 만주 최대의 강으로 그 길이가 3,800리(약 1,492.4㎞)에 이르렀다. 요하가 바다로 흘러드는 발해만의 마지막 항구도시 영구(營口)로부터 요동 북부의 개원(開原)·철령(鐵嶺)까지 배가 왕래하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요하의 수량은 풍부하였다. 19세기에 상류로부터 밀려오는 퇴적물과 철도의 건설로 요하 등의 강을 이용한 운수업이 감소하였으나 1980년대까지도 요하·혼하·요양의 태자하와 같은 강을 이용한 해상운수와 상업이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다.

심양 아래 최대의 도시 요양을 감싸고 흘러 요하로 흘러드는 태자하(太子河)는 동요하(東遼河)와 서요하(西遼河)가 합류하는 삼차하(三叉河)에 이르는 405리(약 159.1㎞)를, 심양의 혼하는 삼차하에 이르는 410리(약 161㎞)를 자유롭게 배를 이용해 왕래할 수 있다. 요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15개의 큰 부두들도 있었다.

이러한 수량이 풍부한 요하와 연결되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요하 동쪽에 위치한 심양은 거대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심양은 한나라 시기부터 군사 중진이었다. 요금시대에는 심양에 토성이 대대적으로 축조되었으며 원나라 시기에도 성곽이 증축되어 거대한 도시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1296년(원 성종 2)에는 심양로가 설치되었고 요양행성의 관할로 삼았다. 명나라는 요동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심양위 등 심양을 위소 체제로 편입하였다.

심양위는 명초에 해당하는 1388년부터 벽돌로 성을 견고하게 쌓기 시작하였는데, 원대에 축조하였던 토성 위에 수축하였다. 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영녕문(永寧門), 서문은 영창문(永昌門), 남문은 보안문(保安門), 북문은 안정문(安定門)이라 불렀다.

1616년 여진의 후금이 건국되면서 명의 심양위는 사라지고 심양은 여진의 점령지가 되었다(『광해군일기』 14년 5월 15일). 후금은 초기 수도로 삼은 요양에서 3년 머물다가 심양으로 천도하면서 요양에 버금가는 심양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청 태종홍타이지가 황제가 되면서 심양성의 수축 공사는 완료되었다. 1634년 4월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636년 국호 후금을 청(淸)으로 개칭하였다.

1644년 청나라는 요동을 석권하고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수도였던 심양은 제2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심양을 봉천(奉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657년 청 정부는 봉천성 내에 봉천부를 설치하였다.

심양에는 2개의 황제릉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복릉(福陵)으로, 동릉(東陵)이라고도 하였다. 동릉은 청나라 태조 곧 누르하치와 그 후비의 능이다. 복릉은 1627년(천총 6)에 시작되어, 1651년(순치 8)에 완성되었다. 복릉은 혼하를 끼고 천주산(天柱山)에 위치하며 강희 연간에 해당하는 1688년에 비정(碑亭)을 세웠는데 비에는 ‘대청복릉신공성덕비(大靑福陵神功聖德碑)’라고 새겨 넣었다.

또 하나의 릉은 소릉(昭陵)인데 곧 북릉(北陵)이라고도 하였다. 심양시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소릉은 1643년(숭덕 8)에 시작되어 1651년(순치 8)에 완성되었는데 관외의 능묘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비정의 비에는 ‘대청소릉신공성덕비(大淸昭陵神功聖德碑)’라고 새겨져 있었다. 심양에는 이들 황제가 건조한 궁궐 곧 고궁(故宮)이 있는데, 심양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심양 고궁은 청 태조와 태종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입관(入關)하기 전에 수도로 삼으며 정치를 보던 궁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심양 고궁은 대정전·십왕정·숭정전·봉황루·청녕궁 등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었다. 청나라는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강희 건륭 등 많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관 후에도 황제들이 10여 차례 이상 동순(東巡)하며 심양 고궁에 머물러 관리들을 접견하는 등 북경 천도 이후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강희제 이후, 능 참배를 목적으로 심양을 방문한 청 황제를 문안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부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라고 하였다(『숙종실록』 8년 3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고궁은 지방의 중요한 유적이 되어 박물관으로 개편되었고, 이에 따라 중요한 문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러한 청 왕조의 심양 천도는 이제 심양이 군사상의 도시에서 정치·군사·문화 중심의 도시로 변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遼海出版社, 『奉天通志』, 遼海出版社, 2003.
  • 白洪希, 『淸入關前都城硏究』, 遼寧大學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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