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읍(食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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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나 공신에게 수조권을 내려 주던 지역이나 호.

개설

식읍은 중국과 한반도의 왕조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토지분급제도였다. 왕족 혹은 특별한 공훈으로 관직이나 작위를 받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처우를 목적으로 국가에서 식읍을 내려 주었다. 식읍은 일정 지역이나 혹은 몇 호(戶)의 형태로 주어졌으며, 식읍을 지급받은 사람은 그 지역이나 호에서 조세를 거두어 쓸 수 있었다. 식읍은 주로 ‘식읍 몇 호, 식실봉(食實封) 몇 호’로 지급되었다. 앞의 식읍은 허봉(虛封)으로서 실제 내려 주는 양과 거리가 있는 명목상의 식읍이었고, 식실봉이 실제 지급하는 호수에 해당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도 식읍을 내려 주는 사례가 있으나 건국 초의 몇 차례에 불과하였다. 마지막으로 식읍을 지급받았던 사람은 수양대군이었다.

내용 및 특징

식읍은 삼국시대 기록에서부터 나타났다. 당시의 식읍은 수조권(收租權)뿐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까지 포괄한 개념이었다. 식읍과 관련된 제도는 고려시대에 대부분 정비되었다. 고려 문종대에 훈작제도(勳爵制度)와 함께 식읍제를 정비하여 공후국공(公侯國公)에게는 식읍 3,000호, 군공(郡公)에게는 2,000호, 현후(縣侯)에게는 1,000호, 현백(縣伯)에게는 700호, 개국자(開國子)에게는 500호, 현남(縣男)에게는 300호를 주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읍 지급이 규정대로 원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식읍을 지급할 때는 명목상의 식읍의 호수와 실제 지급되는 식실봉 호수를 아울러 표기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식읍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몇 차례 식읍을 지급한 사례가 보였다. 먼저, 개국공신 일부에게 식읍을 지급하였다. 개국공신 중 1·2·3위 위차(位次)에 해당하는 성산백배극렴, 평양백조준, 상락백김사형 등에게 각각 식읍 1,000호와 식실봉 300호를 내려 주었다(『태조실록』 1년 12월 13일). 이것이 조선에서 최초로 식읍을 지급한 사례였다. 개국공신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식읍이 지급된 것으로 볼 때, 식읍은 일반적인 봉작보다도 더 명예로운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조준은 본인에게 내려진 평양의 식읍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통해 볼 때, 식읍은 수여 대상자의 본관이나 혹은 세력 본거지에 거주하는 호들로서 지급된 듯하다.

두 번째 경우는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지방에 안치되었던 이방간(李芳幹)에게 식읍 50호를 내려 준 것이었다. 이 경우는 국가의 공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왕족의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식읍이 지급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정종실록』 2년 2월 23일).

마지막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공을 세운 수양대군에게 내려진 식읍이 있었다. 당시 지급 규모는 식읍 1,000호, 식실봉 500호였는데, 식실봉의 호수가 개국공신들이 받았던 액수보다도 많았다. 세조 집권 이후 식실봉에 편성되었던 500호는 모두 본래대로 국가에 환속되었다.

세조대 이후 조선에서 식읍 지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변천

식읍제도는 세조대 이후에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국가가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식읍을 지급하는 이념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효종대 서천군수이무라는 사람의 상소에는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식읍이 없고, 왕자나 도위(徒尉) 등에게 지급되는 것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220결이 전부이다.’ 하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는 왕실이나 궁가(宮家)에 대한 경제적 대우가 없음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궁방전 등에 대한 지급도 국가 재정의 부담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식읍 지급은 현실적인 방안으로 고려조차 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