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관(僧冠)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승려들이 머리에 쓰는 관.

개설

초기 불교 시대에는 승려들이 모자와 관을 착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서는 "모자나 관을 쓰거나 두건을 두르고 있는 자에게는 법을 설하지도 말라"고 할 정도로 모자와 같은 물건을 착용하는 데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대승불교에 이르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머리에 보배관과 두건을 두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승관(僧冠)에 대한 입장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비를 피하기 위해 쓰던 모자인 송낙이 승관으로 일상화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 때 승관은 불교 국가들과 거래한 조공 무역의 한 품목이었다. 승관에는 청사승관(靑紗僧冠), 청저포승관(靑苧布僧冠)(『세종실록』 30년 6월 21일), 아청라승관(鴉靑羅僧冠) 등이 있었으며(『세조실록』 13년 8월 14일), 승려들의 의복인 장삼과 더불어 매매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2년 윤4월 14일).

또한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상례 때 관을 씌우는 착관(著冠) 의식이 있었다. 착관은 염습 이후 행해졌는데, 망인에게 깨달음의 최상 관문을 의미하는 비로관(毘盧冠)을 씌워줌으로써 천명의 성인들과 함께 부처를 이루겠다는 마음에서 물러나지 않고 결국에는 등각 묘각의 부처의 자리에 오르기를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망자를 추천하는 천도 의식에서 승무를 추는 승려들이 쓰는 관을 고깔모라고 부르는데, 이것의 본래 명칭은 비로관으로 ‘최상의 관문으로 나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승관을 쓰는 것은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서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영산재의 승무를 할 때 착용하는 승관은 낙관(樂冠)이라고도 하는데, 3단 형태를 띠고 범어 ‘옴’ 자를 쓰거나 삼지창을 그리기도 한다. 대체로 밀교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작법무 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동하였던 일응 스님의 낙관과 그 제자이기도 하며 호남범패 작법무 보유자 석정 스님의 낙관이다.

P00014506 01.PNG

P00014506 02.PNG

참고문헌

  •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23
  • 일응어산작법보존회·동아시아불교의례문화연구소 편, 『영산에 꽃피다-어장 일응, 그 삶의 여정』, 정우서적,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