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司辰)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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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신 |
한글표제 | 사신 |
한자표제 | 司辰 |
상위어 | 서운관(書雲觀) |
관련어 | 참봉(參奉)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집필자 | 김일권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신(司辰)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세종실록』 2년 3월 13일, 『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세종실록』 16년 7월 1일, 『세종실록』 20년 1월 7일 |
고려초기부터 조선초기까지 서운관에 설치한 시간을 관리하는 종9품 관직.
개설
사신(司辰)은 고려 국초부터 측후와 각루를 맡아보던 태사국(太史局)에 정9품직으로 설치되었던 관직이다. 조선 태조 때 행한 문무백관 관제 제정에서 사신은 최하위 종9품직으로 정원이 4명으로 정해졌다. 1420년(세종 2) 서운관 정원 개정 때 사신은 2명을 감하여 정원 2명으로 조정되었고, 1466년(세조 12) 관상감 개편 때 참봉으로 개칭되어 사신이란 직명은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서운관에서 시간을 관리하고 시보하는 직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사신은 시간을 맡는다는 뜻으로, 당나라 사천대(司天臺)에서 새벽 시간을 알리는 담당자라는 뜻으로 사용한 관직명이다. 청나라 흠천감(欽天監)에서는 사신(司晨)이라 칭하였다. 신(辰)과 신(晨)은 이체자 관계여서 같은 뜻이다. 신(晨)은 닭이 우는 새벽 시간을 의미하고, 신(辰)은 1일 12시진(時辰) 중에서 진시(辰時) 즉 오전 7~9시의 아침을 뜻한다. 시간을 뜻할 때는 신(辰)이라 읽어야 하나, 자축인묘의 12지 관습상 진(辰)이어서 사신(司辰)과 사진(司辰) 둘 다 가능하다. 12지에서 신(辰)이라 하면 신(申)과 혼동된다.
사신은 고려 국초부터 측후와 각루를 맡아보던 태사국에 설치되었다. 문종대에 태사국 직제에서 정8품직으로 영대랑(靈臺郞) 2명, 종8품직으로 보장정(保章正) 1명과 설호정(挈壺正) 2명을 두었고, 그 아래 정9품직으로 사신 2명을 두었다. 더 아래로 최말단 종9품직으로 사력(司曆) 2명과 감후(監候) 2명을 두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 사천감과 태사국을 합쳐 서운관으로 개편하면서 시행한 직제 조정에서 관품이 뒤바뀌었는데, 서운관 실무직으로 장루(掌漏)는 종7품으로 2명, 시일(視日)은 정8품으로 3명, 사력은 종8품으로 3명, 감후는 정9품으로 3명, 사신은 종9품으로 2명을 두는 것으로 개정하였다. 곧 문종대에 종9품직이던 사력이 종8품으로 올랐고, 종9품직이던 감후가 정9품직으로 올랐으나, 사신은 정9품직에서 최말단인 종9품직으로 내려갔다.
조선 태조 때 문무백관의 관제 제정에서도 충렬왕대 직제를 그대로 이어와 정원을 1~2명씩 증원하여 장루 종7품 4명, 시일 정8품 4명, 사력 종8품 4명, 감후 정9품 4명, 사신 종9품 4명으로 정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20년에 서운관 정원이 많다는 비판에 따라 2명씩 일괄 감원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신도 4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세종실록』 2년 3월 13일). 시간을 관리하는 장루와 사신 직책은 서운관과 별도로 금루방(禁漏房)이 따로 있어서 중복되는 문제가 발생하여 자주 문제가 되었다.
1466년 관상감 개편 때 종7품인 장루는 직장(直長)으로, 정8품인 시일은 봉사(奉事)로, 정9품인 감후는 부봉사(副奉事)로, 종9품인 사신은 참봉(參奉)으로 개칭하였고, 사력은 폐지하였다. 이때에 사신이란 관명이 사라지고 참봉으로 바뀌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한편 1434년(세종 16) 7월에 호군(護軍)장영실(蔣英實)이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한, 자격루(自擊漏)에서 시간을 스스로 알리는 목각 인형 장치를 사신목인(司辰木人)이라 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또 1438년(세종 20) 1월에 대호군(大護軍)장영실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건설하고 설치한 옥루기(玉漏機)는 일종의 자동 물시계이다. 『국조보감』에서는 한 칸의 작은 누각 안에 종이로 만든 높이 7척의 산 속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을 두어 물로 움직이게 하였으며, 사신(四神)과 십이신(十二神)을 표시하고, 북 치는 고인(鼓人), 종 치는 종인(鐘人), 사신(司辰)을 맡은 옥녀(玉女)를 장치하여 모든 기관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동으로 치고 움직인다고 그 놀라움을 묘사하였다(『세종실록』 20년 1월 7일). 옥루기를 설치한 흠경각은 『서경』 「요전」의 ‘欽若昊天 厤象日月星辰 敬授人時’에서 따온 말이다.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직관지(職官志)」
- 『고려사(高麗史)』
- 『청사고(淸史稿)』 「직관지(職官志)」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