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지보(甫老知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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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성부에 설치한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다수의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보로지보(甫老知堡)가 소속돼 있는 경성부(鏡城府)는 1411년(태종 11) 3월에 경원진이 폐지된 후 경성에 새롭게 진을 설치하고 길주 이남의 군사들을 부방하게 하면서 군사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세종대에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등 육진 지역이 개척되면서 본격적으로 방어체제가 정비되었다. 경성부에는 어유간보(魚游澗堡)·주을온보(朱乙溫堡)·삼삼파보(森森坡堡)·오촌보(吾村堡)·보로지책(甫老知柵)·보화덕책(甫化德柵)·근동보(芹洞堡) 등의 군사시설이 운영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보로지책은 경성부 남쪽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위치 및 용도

경성부 중심에서 남쪽으로 43리(약 17㎞) 떨어진 보로지천(甫老知川) 변에 설치되었다. 경성부 남쪽으로는 주을온보, 보로지보, 삼삼파보가 명천군(明川郡)으로 가는 길목을 따라 위치하고 있었다. 보로지보와 같은 진보(鎭堡)는 함경도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보로지보는 보로지보 신봉수와 보로지보 화파봉수(樺坡烽燧) 등을 운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보로지보는 1461년(세조 7)에 보로지 구자(口子)로 사료에 처음 등장한다. 함길도도체찰사구치관(具致寬)은 경성의 보로지 구자는 외적이 자주 출몰하여 방어의 어려움이 오진(五鎭)보다도 배가 된다고 하였다(『세조실록』 7년 5월 8일). 중종 연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로지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1524년(중종 19) 함경북도절도사이기(李芑)는 홍수가 나서 냇물이 넘치자 황사언동보(黃士彦洞堡)가 무너져 내려 보의 군졸들이 보로지보의 옛 성으로 들어가서 방어하게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빗물에 무너진 황사언동보를 폐지하고 보로지보와 보화보(寶化堡)를 다시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중종실록』 19년 7월 14일). 이 기사는 1524년 이전에 이미 보로지보는 폐지되었다가 이후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로지보는 1757년(영조 33) 홍수로 무너지자 국왕 영조의 지시에 따라 혁파되었다(『영조실록』 33년 9월 18일).

관련사건 및 일화

1599년(선조 32) 경성창(鏡城倉) 감관(監官)주경호(朱京浩)와 창사령(倉使令)이윤부(李允夫)가 보로지보의 환곡을 봉상하는 일로 보에 들어가다가 적호(賊胡)에게 납치되었는데 주경호는 피살되고 이윤부는 그대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선조실록』 32년 8월 11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