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복사(百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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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영조 9)에 괘서 사건이 발생했던 전라도 남원의 사찰.

개설

백복사(百福寺)는 전라도 남원의 현문(縣門)에서 몇 리 떨어지지 않은 사찰로, 1733년에 괘서사건(掛書事件)이 발생했던 곳이다. 이 외에는 백복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남원현 근처에 만복사(萬福寺)라는 이름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만복사를 백복사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대에 창건된 후 조선시대 들어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재건되었으나 현재는 폐허가 되어 유물만 남아 있는 폐사지이다.

내용 및 특징

만복사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되어 융성하다가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선조 30)에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만복사에 대해 "부의 서남쪽에 있다. 그 동쪽에 오층전(五層殿)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二層殿)이 있으며, 전각 안에 철불(鐵佛)이 있는데, 길이 35척, 무게 13,000근이며, 그 전각의 모습이 기이하다."고 하였을 정도로 규모 있는 사찰이었다[『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남원도호부].

만복사는 1678년(숙종 4)에 남원부사정동설(鄭東卨)에 의해 중건되었는데, 이때에 전체를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萬)’을 ‘백(百)’으로 고쳐 백복사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만복사지(萬福寺址)에는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30호)을 비롯하여 석좌(石座, 보물 제31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32호), 석불입상(石佛立像, 보물 제43호) 등이 남아 있어 원래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백복사에 대해서는 1733년(영조 9)에 발생한 괘서 사건과 관련하여 『영조실록』에만 등장할 뿐이고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영조실록』에서 "현문(縣門)에서 거리가 몇 리밖에 안 된다."(『영조실록』 9년 4월 16일)고 하였으므로, 만복사를 백복사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정구복, 「남원 만복사지 제1차 발굴약보」, 『古文化』18, 1980.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