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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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정(弊政)을 일삼는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정치 활동.

개설

반정(反正)은 혼란한 국면을 다스려서 정상을 회복시킨다는 『춘추(春秋)』의 ‘발란반정(撥亂反正)’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혼란한 정치를 정상으로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정조실록』에서는 한문의 문장 체제를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회복하자는 의미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① 조선전기의 반정

전제군주제 사회인 조선 왕조에서 군주를 비상한 방법으로 교체하는 정치적 변통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고려 왕조를 조선 왕조로 교체하는 역성혁명의 경우에도 집권 세력의 급격한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정변을 ‘반정’으로 규정했다[『정종실록』 2년 11월 11일]. 종친에 의한 친위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한 세조도 자신의 정변을 반정으로 정당화했다[『단종실록』 1년 11월 20일].

② 중종반정의 성격

신하들의 주도로 왕위가 교체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군신 관계의 상대화를 가져온 정치 행위로 주목해야 한다. 중종반정은 강상론(綱常論)이 사회·정치 질서로 정착되어 가던 시기에 신료 주도로 이루어진 왕위 교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중종실록』 2년 3월 30일]. 중종은 반정 세력의 선택으로 갑자기 왕위에 오른 까닭에, 중종의 치세는 신권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신권 국가로 변모하는 전기가 되었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모색하면서 한편으로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하던 군신 권력관계가 관료 지배 체제의 틀 속에서 상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③ 인조반정의 성격

반정의 명분과 정당성이 취약했던 인조반정은 중종반정으로 상대화된 군신 권력관계를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광해군이 동기(同氣)를 살해하고 모후(母后)의 폐출을 시도하여 패륜을 행했으며,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고 오랑캐와 통하여 예의와 삼강을 쓸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대 대북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킨 중요한 요인은 정책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각 붕당 간의 세력 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집권한 서인 세력은 남인을 부분적으로 기용하면서 정국의 안정을 기하고, 초기에는 광해군과는 다른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과 왕족에 대한 포용책을 채택했다[『인조실록』 1년 5월 10일]. 그러나 후금의 정치 군사적 압력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포기했으며, 역모 사건에 연루된 왕족을 처벌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스스로 정변의 명분을 훼손시켰다.

중종과 인조의 정변 세력은 반정의 명분을 정치 개혁에 접목시키기보다는 정국 현안에 함몰되어 반정이라는 공허한 구호만을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④ 정조의 문체반정 운동

정조대에는 반정을 문화 운동 용어로도 사용하였다. 문체반정 운동은 정조가 남인계가 수용했던 서학과 노론계가 수용했던 패관 문학을 모두 명나라와 청나라 문화의 폐단으로 비판하면서 벌였던 신문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권력화한 집단인 경화벌열(京華閥閱)을 견제하면서 변화를 유도하려는 탕평책의 일환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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