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博覽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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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문화와 산업 물품을 한자리에 모으거나, 한 나라 또는 지역의 각종 사물이나 상품을 모아 진열해 놓은 것.

개설

박람회는 19세기에 세계의 상품과 문화가 교류하는 장이었다. 대한제국기에 해외 박람회에 본격적으로 참가한 것은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였다. 그보다 앞선 1893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컬럼비아 세계박람회에 참여하였던 성과를 더욱 발전시켜 대한제국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국가 홍보성 참가였다. 대한제국에서는 민영찬 등 박물대원을 파견하고 파리 만국박람회 현장에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대한제국관을 세워 농업·광산·상업 등 다양한 산업의 생산품 및 복식·가구·공예품과 무기류 등을 진열하여 대한제국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독립국임을 널리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박람회가 끝난 뒤 물품을 프랑스의 각 박물관에 기증하여 우리나라의 문화를 홍보하였다.

국내에서는 1906년 부산에서 일한 상품박람회가 처음 열렸고, 1907년에 서울에서 경성박람회가 열렸는데, 이는 통감부의 주최로 일본 상품을 알리는 행사의 성격이 짙었다.

연원 및 변천

한국인이 처음 박람회에 접한 것은 1881년 조사시찰단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의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를 시찰한 것이었다. 당시 조사시찰단의 보고서에는 박람회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1883년에는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던 보빙사 일행이 보스턴의 기업박람회를 관람하였으며 비공식적으로 물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1889년 프랑스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비공식적이나마 물품을 출품하였다.

본격적으로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47개국의 하나로 국가적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이후 외국에서 열리는 박람회의 참가를 제도화하기 위하여 1895년에 농상공부 관제를 정하고 1899년에 임시 박람회 사무소 규칙을 반포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시카고 만국박람회 참가의 경험을 살려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직적으로 응대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은 콜랭 드 플랑시의 주선으로 1901~1902년 하노이 만국박람회에도 출품하였다.

이후 외국의 박람회에 조직적으로 응대할 수 있도록 1902년 국내 및 외국박람회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하는 임시 박람회 사무소를 설치하고 9월에 시행규칙을 마련하였다. 1904년 7월에는 농상공부의 임시박람회 사무소 관제를 폐지하고, 농상공부에 박람회 권업과를 신설하여 관련 제도를 정비하였으나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실제로 많은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1906년 4월 25일~7월 25일에 부산일본 상품 진열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박람회인 일한 상품박람회가 열렸으며, 8월부터 12월까지는 상품을 진열한 기차가 각 지방을 순회하는 이동식 전조선철도박람회도 개최되었다. 1907년 9월 1일~11월 15일에 서울 황금정(을지로)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인접한 대동구락부와 그 일대에서 개최된 경성박람회는 상품의 전시뿐 아니라 관람객의 여흥을 위하여 기생들과 군악대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이 행사는 당시 한국을 방문하였던 일본 황태자의 방한 일정과 맞춘 것이기도 하였다. 경성박람회는 상공회의소가 주최한 것이나 통감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경성박람회 물품 출품 수는 79,000여 점이었고, 관람자 수는 208,000여 명이었다. 이러한 박람회 개최는 한일합방 뒤 1915년 9월 11일~10월 31일 동안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로 이어졌다.

절차 및 내용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참가는 1891년 5월 시카고 세계박람회 위원회에서 임명한 고워드가 조선을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요청하면서 실행되었다. 고종은 1893년 1월 정경원을 출품 사무대원으로 임명하고, 정경원은 2월에 박용규·이채연·채훈문과 통역 안기선과 함께 악사 10명을 인솔하여 떠났다. 이때에는 “제조와 교양관”에 전시실을 마련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의복과 가구, 도자기 등 공예품 및 투구와 갑옷, 대포 등 무기류도 전시하였다. 박람회 기간 동안 악사들은 홍의(紅衣)를 입고 조선 전통 음악을 연주하였다.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는 조선 정부가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뒤인 1893년 프랑스의 요청을 수용하여 이루어졌다. 정부는 1896년 1월 참가요청을 수락하고, 1897년 1월 민영환이 유럽공사로 임명되면서 박람회 업무를 전담하였다. 1898년 사업가인 루리나를 파리 주재 조선총영사로 임명하여 참가를 진행하였다. 프랑스공사플랑시의 협조와 루리나총영사, 모리스 쿠랑, 알레베크, 미므렐 백작 등의 도움으로 3년여의 준비 끝에 파리 슈프렌가의 한쪽에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글레옹 남작이 대한제국관 건립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였으나 그가 갑자기 사망하자 미므렐 백작이 이를 이어 총무대원으로서 공식 전시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관의 계획이 다소 축소되기도 하였다. 전시관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형태로 지었으며, 전시된 물품은 청화백자 등의 도자기, 해금과 거문고·북 등의 악기, 철제 용 조각, 종이와 자수 등 공예품, 비단, 장롱, 의복, 가마, 그림, 책 등으로 농산품과 수공예품이 중심이었다. 파리 만국박람회의 출품은 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였다기보다는 국가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았으며 2개의 금메달과 10개의 은메달,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물품들은 일부를 판매하고 남은 것은 프랑스 현지의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는 대한제국의 문화와 산업을 세계에 알리는 하나의 계기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출품 물품 중 옷감, 문발, 자리, 자개장, 자수 병풍 등은 미국 현지인의(에게) 큰 반응을 얻었다. 이때 출품하였던 의복과 공예품 및 해금· 대금·가야금 등의 악기들은 미국 세일럼의 피바디 박물관과 시카고 필드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는 십장생 병풍과 나전칠기, 활과 화살 등을 구입하였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대한제국관에는 조선시대의 갑옷과 여성의 치마저고리, 여성이 나들이할 때 쓰는 모자인 전모(氈帽) 등 복식이 전시되었으며, 양반이 가마를 탄 모습이 마네킹으로 연출되는 등 대한제국의 생활 민속도 많이 소개되었다. 출품된 물품들은 프랑스 국립공예예술박물관 및 국립음악원의 악기박물관, 기메 동양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서울역사박물관 편, 『정동 1900』, 서울역사박물관, 2012.
  • 이각규, 『한국의 근대박람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13, 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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