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개(滿月介)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만월개 |
한글표제 | 만월개 |
한자표제 | 滿月介 |
동의어 | 만을월개(滿乙月介), 만타라한(滿打喇漢) |
관련어 | 만장(滿將), 만차(滿差), 소현세자(昭顯世子), 채삼(採蔘), 호시(互市)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건주여진~청/조선 |
왕대 | 건주여진~청/조선 |
집필자 | 이선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시호: 경민(敬敏) |
성별 | 남 |
생년/일 | ? |
몰년/일 | 1646년 |
출신지 | 건주여진(만주) |
관력 | 니루 어전[牛彔額眞], 예부(禮部) 참정(參政), 2등 잘란 장긴[二等甲喇章京]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야후([雅虎], yahū)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만월개(滿月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7년 2월 25일, 『인조실록』 9년 6월 15일, 『인조실록』 9년 6월 28일, 『인조실록』 9년 윤11월 21일, 『인조실록』 10년 10월 9일, 『인조실록』 10년 10월 4일, 『인조실록』 17년 9월 27일, 『인조실록』 17년 9월 29일, 『인조실록』 18년 2월 2일 |
해서여진 하다부 사람 야후[yahū, 雅虎]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누르하치에게 귀부한 만다르한([滿達爾漢], mandarhan)의 한자 이름.
개설
만다르한은 어린 시절 부친 야후([雅虎], yahū)를 따라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귀부하여 만주 정황기(正黃旗)에 예속되었다. 아버지를 이어 니루 어전([牛彔額眞], niru ejen)의 관직을 받았고 홍타이지를 따라 동해여진 정벌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조선 출신의 역관 둥나미([董納密, 박중남(朴仲男)], dungnami)와 함께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하여 교섭을 진행하였다. 예부(禮部)와 관련한 관직에 자주 임용되어 참정(參政)과 승정(承政)을 지냈으며 조선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다. ‘만월개(滿月介)’의 ‘월(月)’은 훈독하여 ‘달’로 읽으며, 개(介)는 합(哈)과 동일하게 쓰여 한, 칸 혹은 하, 카 등으로 읽히었다. 사료에 따라 만을월개(滿乙月介) 혹은 만타라한(滿打喇漢)로도 나타나고, ‘만차(滿差)’나 ‘만장(滿將)’ 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였다.
가계
만다르한은 해서여진 하다의 후손으로 하다나라([哈達納喇], hadanara)씨이며, 아버지는 야후였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던 마푸타([馬福塔], mafuta)는 만다르한의 친동생이었다.
활동 사항
만다르한은 부친 야후와 함께 건주여진에 귀부한 이후 만주 정황기에 예속되었고, 캄다니([哈穆達尼], kamdani)와 함께 구왈차([卦爾察部],gūwalca)를 공격하여 포로 2,000명을 잡아오는 공적을 세웠다. 만다르한은 부친의) 니루 어전 관직을 계승하였고, 태종홍타이지를 수행하여 동해여진 후르카부 공격에 참가했다.
만다르한은 조선에도 자주 왕래하였는데, 1628년 11월과 1629년 2월 등 두 차례에 걸쳐 평안도 의주·용천 일대로 들어왔다. 1629년의 방문 때에는 한성으로 들어와 인조를 접견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7년 2월 25일). 이때 그는 의주 일대의 호시(互市) 문제와 인삼 채취를 위한 월경 문제를 논의하였다.
1631년 음력 5월 만다르한은 홍타이지의 서신을 지참하고 명군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 근경의 여러 섬을 공격하기 위하여 필요한 선박을 요구하러 둥나미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인조를 접견하였다(『인조실록』 9년 6월 15일)(『인조실록』 9년 6월 28일). 만다르한은 그해 6월에 귀국한 직후 예부(禮部)참정(參政)에 임명되었다. 윤11월 쿠르찬([庫爾纏], kūrcan)과 함께 월경과 주회인(走回人)의 은닉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조선에 다녀왔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1일).
만다르한은 이후 조선과의 교섭에 많은 역할을 하였고, 특히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조제를 위하여 방문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0년 10월 9일). 이때의 사행에서 만다르한은 조선이 보내는 예물의 품질이 떨어지고, 또 양이 줄고 있다는 등의 불만 사항을 평안도관찰사에게 전달하였다(『인조실록』 10년 10월 4일).
만다르한은 1634년 대동(大同) 공격전에서 공을 세우고 세습직 니루 장긴에 임명되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홍타이지와 함께 우익군(右翼軍)에서 종군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아지거[ajige, 阿濟格]를 수행하여 피도(皮島)를 점령하였다. 이후에 예부(禮部) 승정(承政)으로 승진하였다. 1639년에도 조선을 방문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일시 귀환을 논의하였다(『인조실록』 17년 9월 27일)(『인조실록』 17년 9월 29일). 실제로 소현세자 일행은 이듬해인 1640년에 일시적으로 조선에 귀환하였다. 그보다 앞서 만다르한의 동생 마푸타가 사망하자 조선에서는 그에 대한 조제를 마련하고 만다르한도 위문하게 하였다(『인조실록』 18년 2월 2일).
1644년 청이 산해관에 들어간 뒤 2등 잘란 장긴[二等甲喇章京]이 되었다가 2년 뒤에 사망하였다. 만다르한은 조선에 자주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그가 방문하였을 당시의 접대 방식은 이후 청의 사신에 대한 의례의 마련에 참고되었다.
상훈 및 추모
사후에 경민(敬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김종원,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혜안, 1999.
- 배우성, 「서울에 온 청의 칙사 마부대와 삼전도비」, 『서울학연구』 38,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