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주(登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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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중국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하였던 행정구역의 이름.

개설

621년 당(唐)나라 고조(高祖)이연(李淵) 때 설치되었다.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요동(遼東)·한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또한 해상교통에 유리하여 해상무역이나 어업(漁業)·염업(鹽業)이 발달하였다. 송(宋)·금(金)·원(元)시기를 거치면서 발전하였고 명·청 시기에는 해금(海禁)의 영향을 받아 잠시 쇠퇴하였다가 해금이 완화되면서 다시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대에는 등주의 어민들이 조선으로 넘어가 어업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 환경

동북쪽의 발해(渤海)와 동남쪽의 황해(黃海) 연안에 위치하여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사계절이 뚜렷하였다. 또한 바다와 인접해 있어 예로부터 항로(航路)가 발달하여 배가 지나는데 유용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 해산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형성 및 변천

당나라 고조대에는 문등(文登)·관양(觀陽) 2현만 관할하였고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다. 이후 관할 지역이 꾸준히 확대되어 758년 당나라 숙종대에는 봉래(蓬萊)·황현(黃縣)·문등·모평(牟平) 4현을 관할하였다. 5대 10국 시기에는 여러 정권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그 행정구역 체계는 당나라의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등주도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송나라 때에는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등주가 경동동로(京東東路)에 속하였는데, 그 관할 지역은 당나라 때와 같았다. 금나라 때에는 등주의 관할 지역에 변동이 있었는데, 원래 등주 소속이었던 문등·모평 2현이 영해주(寧海州)에 귀속되었다. 등주에는 새로이 복산(福山)·서하(栖霞) 2현이 추가되어, 봉래·황현·복산·서하 4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원나라 때에는 지역에 염방사(廉訪司)와 선위사(宣慰司)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등주는 산동동서도선위사(山東東西道宣慰司)에 귀속되었고 그 관할 범위는 금나라 때의 4현과 같았다.

명나라 때 등주는 산동포정사사(山東布政使司) 내주부(萊州府) 아래 소속되었다가 1376년(홍무 9)에 등주부(登州府)로 승격되었다. 또한 그 관할 지역은 영해주·봉래현·황현·복산현·서하현·초원현(招遠縣)·내양현(萊陽縣)·문등현의 8곳이었다.

청나라 때에는 등주부가 산동성(山東省)에 속하였고, 기존의 8곳에 해양현(海陽縣)이 추가되어 총 9곳을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반청(反淸) 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강력한 천계령(遷界令)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해안에 사는 주민들을 강제로 내지(內地)로 이동시키는 정책이었다. 이때 등주 지역도 해안으로부터 40리에 이르는 지역을 비워야 했다. 반청 세력이 진압된 이후 강희제가 해금을 완화시켜 줌으로써 이 지역으로 주민들이 이동하여 살 수 있었다.

위치 비정

현재 중국 산동성 연태(烟台)와 위해(威海) 지역을 말한다.

관련 기록

등주는 조선의 황해도나 평안도와 바닷길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에는 등주와 주변 지역에서 명나라의 수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6년 7월 15일).

청나라 때에는 강희제가 해금을 완화해 준 이후 등주의 어민들이 조선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숙종대 소강첨사(所江僉使)이훈(李暈)이 잡은 50여 명의 사람들도 등주 출신이었다. 배 안에는 의복과 그릇 외에 무기는 없었기에 어부임을 알 수 있었다(『숙종실록』 29년 6월 27일). 경종대에 안흥진에서 잡힌 사람들도 등주 출신이었는데, 육지에 올려 청나라로 압송하는 것을 꺼려서 도로 배에 태워 놓아 보냈다(『경종실록』 1년 윤6월 12일).

참고문헌

  • 『금사(金史)』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 『신당서(新唐書)』
  • 『청사고(淸史稿)』
  • 安作璋, 『山東通史-明淸卷』, 山東人民出版社, 1994.
  • 楊强, 『北洋之利』, 江西高校出版社, 2005.
  • 張彩霞, 『海上山東』, 江西高校出版社,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