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릉(德陵)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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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덕릉 |
한글표제 | 덕릉 |
한자표제 | 德陵 |
상위어 | 능원(陵園) |
관련어 | 덕안릉(德安陵), 목조(穆祖), 안릉(安陵),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욱 |
장소 | 함경도 경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덕릉(德陵) |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의 능.
개설
목조이안사가 처음 묻힌 곳에 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두만강 건너편 알동(斡東)에 그의 무덤이 있다는 설과 경흥에 있다는 설이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흥에 안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뒤 목조를 비롯한 4대조를 추존했는데, 그에 따라 목조의 무덤도 능으로 추숭되었다. 이후 덕릉은 1410년(태종 10)에 목조의 부인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무덤인 안릉(安陵)과 함께 함흥으로 옮겨졌다.
조성 경위 및 조성 상황
이안사는 세거지인 전주에서 지방관과 불화를 겪은 뒤 위협을 느껴, 가솔을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 뒤 다시 함길도 의주로 옮겨 갔다가, 원나라에 귀화한 후 국경 너머 두만강 건너편 알동에 정착하였다. 이후 1274년(고려 원종 15)에 사망한 이안사는 『태조실록』에 따르면, 공주성(孔州城) 남쪽 5리 지점에 안장되었다. 공주성은 세종대에 경흥으로 개칭된 곳이다[『태조실록』「총서」].
덕릉은 적지평(赤地坪)의 원봉(圓峰)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8년(태조 7)에, 덕릉과 안릉이 있는 곳이라 하여 공주를 경원부로 승격시켰다. 1410년(태종 10)에는 야인들의 침입을 걱정하여, 덕릉과 안릉을 함흥 지역으로 옮겼다. 새로 조성된 능은 같은 곡장(曲墻) 내에 봉분을 달리한 동원이영(同原異塋)의 형태로서 덕릉은 오른쪽에, 안릉은 왼쪽에 있다. 합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능호를 존중하여 덕릉과 안릉의 능호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덕안릉’이라 불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덕안릉에는 상석(象石)으로 혼유석 2개, 장명등 1개, 안보석(安寶石) 1개를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1쌍씩, 마석(馬石)과 양석(羊石)이 각각 2개씩 있었다. 상석 앞쪽에는 정자각이 있었으며, 정자각 오른쪽에는 수라청이 건립되어 있었다. 또 정자각 동쪽에는 홍살문과 표석이 세워져 있었고, 홍살문 밖에 재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덕릉의 제향은 속제(俗祭)에 속하였으며, 정기제로는 한식제가 있었다. 능관은 참봉(參奉) 2명, 봉수관(逢授官) 1명을 두었는데, 봉수관은 제물을 받들어 올리고 능침을 수리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관련 사항
목조가 처음 안장된 곳이 경흥이 아니라 알동이라는 설이 있다. 「정릉구비음기(定陵舊碑陰記)」와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에 따르면, 목조의 무덤은 두만강 건너 알동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후기에 편찬된 『동여도(東輿圖)』에는 옛 알동 지역에 덕릉과 안릉이 있었는데, 1395년(태조 4)에 경흥의 능평(陵坪)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경흥에는 덕릉의 옛터임을 나타내는 비석이 있었는데, 전면에 ‘목조구릉(穆祖舊陵)’, 후면에 ‘홍무이십팔년이월일입석(洪武二十八年二月日立石)’이라고 적혀 있었다. 홍무 28년은 1395년(태조 4)으로, 『태종실록』의 기사와는 일치하지 않지만 『동여도』의 기록과는 일치한다. 1735년(영조 11)에는 경흥에 있었던 목조의 흔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각을 세워 이 비석을 보호하였다.
참고문헌
- 『북도릉전지(北道陵殿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윤정, 「숙종 후반기 北道 사적 인식과 정비 논의」, 『역사와 경계』7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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