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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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초기 주로 문서에 관한 각종 업무를 담당하였던 다하이([達海], dahai)의 한자 이름.

개설

다하이는 한문 등에 관한 식견을 바탕으로 누르하치~홍타이지 시절 대명 교섭이나 만주 문자 창제 등 외교 및 문서 행정에 관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가계

건주여진의 기오르차([覺爾察], giorca) 출신으로 해당 지역 이름을 성으로 삼았으며, 조부 때부터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를 따라 참전하였다.

활동 사항

만주 정람기(正藍旗) 소속인 다하이는 약관의 나이에 누르하치에게 기용되었다. 1620년에 한의 시녀로부터 2필의 남포(藍布)를 받았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질 뻔 하였으나, 한문에 능통한 인재임이 참작되어 대신 굵은 나무에 쇠사슬로 묶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후 홍타이지에 의하여 재임용되었고, 1629년 문관(文館, [bithei yamun])이 설립될 당시 명조의 고서(古書)를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조선과의 국서 교환이나 사신 접대 등에 여러 차례 참여하였고(『광해군일기』 11년 4월 17일)(『인조실록』 5년 12월 22일), 1629~1630년 후금의 명 공략전 당시에는 명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등 외교에도 관여하였다. 1632년에는 기존의 무권점(無圈點) 만주 문자, 일명 ‘노만문(老滿文)’에 수정을 가한 유권점(有圈點) 만주 문자, 곧 ‘신만문(新滿文)’을 형성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그해 7월 무렵 38세의 나이에 병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명회전(明會典)』·『소서(素書)』·『삼략(三略)』 등을 만주어로 번역하였고, 이후 『자치통감(資治通鑑)』·『육도(六韜)』·『맹자(孟子)』·『삼국지(三國志)』 등의 번역에 착수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상훈 및 추모

1636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69년에는 다하이 후손의 요청에 따라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유소맹,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2013.
  • 최진규, 「청의 중국 지배와 필첩식」, 『중국사연구』 46,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