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변(戴朝弁)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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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조변 |
한글표제 | 대조변 |
한자표제 | 戴朝弁 |
관련어 | 임진왜란(壬辰倭亂), 조승훈(祖承訓), 평양성(平壤城) 전투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규철 |
성별 | 남 |
몰년/일 | 1592년 7월 |
관력 | 유격장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조변(戴朝弁)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
임진왜란 당시 요동군 소속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의 장수.
개설
대조변은 임진왜란 당시 명에서 조선으로 처음 파견했던 요동군에서 유격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요동군의 지휘는 총병(摠兵)조승훈(祖承訓)이 담당했다. 조승훈은 참장(參將)곽몽징(郭夢徵)과 유격사유(史儒)·왕수신(王守臣)·대조변 등을 장수로 인솔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승훈은 무리하게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일본군에 대패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대조변과 사유 등 용장 대부분이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대조변은 자신이 인솔한 부대의 군령(軍令)을 엄격하게 하여 조선의 백성들과 신료들이 그를 높게 평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대조변의 전사를 특히 애통하게 여겼다.
활동 사항
1592년(선조 25) 7월 조승훈이 인솔했던 요동군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오기 직전 탕참(湯站)에서 진수총병(鎭守摠兵)양소훈(楊紹勳)의 주도 아래 작전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부대의 전열을 갖춘 다음 본격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도 양소훈의 요청에 따라 미리 명군의 이동을 돕기 위해 청천강(淸川江)과 대정강(大定江)에 부교(浮橋)를 설치해 놓았다. 동시에 명군이 사용할 군량과 선척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조승훈은 유성룡(柳成龍)과 김명원(金命元) 등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용맹을 믿고 일본군을 급하게 공격하고자 했다. 조승훈은 여진족과의 거듭된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실전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지휘관이었다. 자신의 무예와 지휘 방식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조승훈은 일본군을 손쉬운 상대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력이 많지 않다는 소식을 보고받고는 하루라도 빨리 공격을 감행해 전공을 세우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승훈은 요동군을 인솔하고 행군하던 중 가산(嘉山)에 이르러 평양성의 일본군이 그대로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이에 조승훈은 명군이 평양에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일본군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것은 하늘이 자신의 성공을 도우려는 것이라며 술잔을 들어 미리 자축까지 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하지만 명군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평양 일대의 지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계속된 폭우로 길바닥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기병(騎兵)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명군의 주력이 기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조승훈은 참장곽몽징과 유격사유·왕수신·대조변 등을 파견해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당시 명군은 순안(順安)에서 출발해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도원수김원명은 장수와 3천 명의 조선군을 뒤따르도록 조치했다. 처음에 일본군은 뜻밖의 군사가 공격해 오자 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안에서 매복하여 기다렸다. 명군의 두 장수가 군사를 인솔하고 곧바로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가자 일본군이 좌우에서 일제히 조총을 쏘았다. 폭우로 진창이 되었으므로 명군의 군사와 말이 빠져서 적절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명군의 장수 중 사유가 먼저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조승훈은 급히 퇴각했지만 후군(後軍)은 대부분 전사했다. 그리고 대조변과 그의 천총(千摠)장국충(張國忠)·마세륭(馬世隆) 등도 모두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대조변은 군령이 매우 엄격해 백성들이 그를 편하게 여겼는데,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사람들은 더욱 애석하게 여겼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166, 한국사연구회, 2014.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 - 청병외교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제1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조원래,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최소자, 「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 『동양사학연구』11, 동양사학회, 1977.
- 최영희, 「임진왜란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