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하(大陵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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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릉하 |
한글표제 | 대릉하 |
한자표제 | 大陵河 |
관련어 | 달자(撻子), 대녕도지휘사사(大寧都指揮使司), 삼차하(三叉河), 소릉하(小陵河), 올량합삼위(兀良哈三衛)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지명 |
지역 | 중국 |
시대 | 명~청 |
왕대 | 명~청 |
집필자 | 남의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릉하(大陵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18년 12월 10일, 『인조실록』 9년 9월 18일, 『인조실록』 9년 윤11월 23일, 『인조실록』 17년 11월 25일 |
중국 요녕성 서부의 강줄기를 합쳐 요동만으로 흘러드는 강.
개설
대릉하는 요녕성(遼寧省) 서부에 위치하며 요녕성에서 세 번째로 큰 하천이다. 상류는 남·북 두 지류로 나누어지는데, 남쪽 지류는 건창현(建昌縣)에서, 북쪽 지류는 능원시(凌源市)에서 각각 발원한다. 이 두 지류는 객좌현(喀左縣)에서 합쳐져 조양시(朝陽市)를 거쳐 계속 동쪽으로 흐르다 의현(義縣)에서 세하(細河)와 다시 합류하여 남쪽으로 향하고 금양시(錦陽市)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대릉하 지역은 주목할 만한 신석기 유적과 초기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어 고대 한국문화와 고조선시대의 역사 전개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대릉하 지역은 특히 명·청 시기에 행정기관이 설치되고 개발이 이루어져 요동의 중요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 환경
대릉하 본류의 길이는 397.4㎞이고 유역 면적은 23,549㎢이다. 대릉하 상류 지역은 저산구릉(低山丘陵) 지대이며 연산산맥(燕山山脈)이 계속 이어진다. 대릉하는 송령(松嶺)과 노로아호산(奴魯兒虎山) 사이에서 흐르며 이 지역은 해발 1,200m에 이른다. 하류는 폭이 좁고 긴 요서회랑(遼西回廊)에 위치하며 이 지역은 대(大)·소릉하(小陵河) 충적평야 지대이다. 전체적으로 대릉하 지역은 “칠산일수이분전(七山一水二分田)”의 지대, 즉 구릉이 70%, 하천이 10%, 평야가 20%를 차지하고 있다. 지세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았다. 현재는 난개발로 산림이 매우 적으나, 강희 연간까지도 무성한 산림지대였다.
형성 및 변천
동북아시아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문화유적이 대릉하 상류의 우하량(牛河梁)에서 발견되면서 주목되었다.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명명된 유적에서 초기 청동기가 발견되어, 고조선의 강역과 연결 지어 논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대릉하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명·청시대 들어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명·청시대에는 대릉하 지역에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는데, 명나라 초 홍무제(洪武帝)는 요동에 잔존하는 북원(北元)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존의 주현(州縣)제도를 모두 폐지하면서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와 대녕도지휘사사(大寧都指揮使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영락제(永樂帝)가 정권을 장악하고 대녕을 포기하면서 방어선이 축소되었고, 대릉하 상류 지역에서는 몽골 올량합삼위(兀良哈三衛)가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었다. 이에 대릉하 지역 중 상류는 올량합삼위에 속하였고 하류는 요동도지휘사사의 광녕위(廣寧衛)·의주위(義州衛)·영원위(寧遠衛) 등에 위치하였다.
청나라가 북경(北京)으로 진출하여 본토를 점령하자, 만주족들도 함께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요동 지역의 인구가 부족해지자 청 정부는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장려하였다. 순치제(順治帝) 시기에는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고, 강희제(康熙帝) 시기에는 요서(遼西) 지역을 중심으로 금주부(錦州府)를 설치하였다. 이 금주부 관할의 금현(錦縣)·의주(義州)·영원주(寧遠州)·광녕현(廣寧縣)은 대릉하 하류 지역에 위치하였다. 청 왕조는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맹기제(盟旗制)를 실시하였는데, 대릉하 상류 지역은 탁삭도맹(卓索圖盟)에 해당하며 연안에 객라심좌기(喀喇沁左旗)·토묵특우기(土黙特右旗)·토묵특좌기(土黙特左旗)가 있었다. 건륭제(乾隆帝) 시기에 한족(漢族)의 이민으로 인구가 증가하자, 대릉하 상류 지역에 승덕부(承德府)를 설치하고 조양현(朝陽縣)과 건창현(建昌縣)을 배치하였다. 이로써 청대 대릉하 지역에서는 대체로 민(民)·기(旗) 이종 통치방식이 완성되었다.
명·청시대 대릉하 지역은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중원과 동북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가장 먼저 개발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중국 요녕성 서부.
관련 기록
대릉하 지역은 조선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길이었는데, 명종대에는 대릉하에서 달자(韃子), 즉 오랑캐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명종실록』 18년 12월 10일). 또한 명나라와 후금이 대치하던 시기에는 오랑캐, 즉 후금이 명의 조승훈이 방어하던 대릉하를 침범하였다는 소식이 조선의 사신을 통하여 전해지기도 하였다(『인조실록』 9년 9월 18일)(『인조실록』 9년 윤11월 23일). 병자호란 후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에 공미(貢米)와 원병을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물자를 대릉하 지역으로 운반하라고 하였다(『인조실록』 17년 11월 25일).
참고문헌
- 『명사(明史)』
- 남의현, 『명대 요동지배정책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8.
- 佟冬, 『中國東北史』 4卷, 吉林文史出版社, 1987.
- 이형구, 「대릉하 유역의 은말주초(殷末周初) 청동기문화와 기자 및 기자조선」, 『한국상고사학보』 5집, 한국고대사연구회, 1991.
- 우동효, 「명청시대 대릉하지역의 개발과 환경변화」,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