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내전정홍(大內殿政弘)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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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내전정홍 |
한글표제 | 대내전정홍 |
한자표제 | 大內殿政弘 |
동의어 | 대내정홍(大內政弘),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 |
관련어 | 대내별가다다량정홍(大內別駕多多良政弘), 위사(僞使)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성익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아명: 귀동환(龜童丸)신개(新介), 대내개(大內介) |
성별 | 남 |
생년/일 | 1446년 9월 18일 |
몰년/일 | 1495년 10월 6일 |
출신지 | 일본 |
관력 | 증종삼위주방개(贈從三位周防介), 좌경대부(左京大夫)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대내교홍(大內敎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내전정홍(大內殿政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4년 8월 9일, 『성종실록』 5년 7월 27일, 『성종실록』 10년 4월 21일 |
일본 전국시대의 영주.
개설
다다량(多多良)은 대내씨(大內氏)의 본성으로 대내씨는 백제 성왕의 왕자인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시조로 하였다. 실정시대 대내씨는 주방(周防)을 본거로 하는 서일본의 대표적인 영주가 되었다. 대내씨는 조선과의 통교시 ‘대내다다량(大內多多良)’을 명의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 문헌에 등장하는 대내정홍(大內政弘)·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은 대내전정홍을 가리켰다.
대내정홍은 대내씨 13대 당주 대내교홍(大內敎弘)의 장남으로 1446년 태어났다. 아명은 귀동환(龜童丸)이며, 보통 신개(新介)·주방개(周防介) 등으로 칭하였고 관위는 좌경대부(左京大夫)에 이르렀다. 1457년 부친 교홍과 막부의 사이가 악화되었을 때 막부가 교홍을 대신하여 당주로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1465년 교홍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대내씨 당주가 되고 주방(周防)·장문(長門)·풍전(豊前)·축전(筑前) 4개국(國) 수호직도 계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전대부터 계속된 세천(細川)씨와의 대명 감합무역을 둘러싼 마찰로 세천씨에 대한 적대적 자세를 고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1467년 발발한 응인의 난 때에는 산명(山名)씨 측의 서군에 가세, 상경하여 서군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틈을 타 1469년 한때 대내씨에 의하여 크게 세력이 위축되었던 소이씨(小貳氏)가 축전을 공략하고 1471년에는 구주의 세력을 배경으로 백부 대내교행(大內敎幸)이 모반을 일으키는 등 지배 영역에서의 위기가 커졌다. 그 뒤 전란이 점차 수습되어 가고 아울러 정홍에 대한 막부 측의 회유도 이어져 양측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1477년 10월 새로 장군이 된 족리의상(足利義尙)에 의하여 정홍의 4개국 수호직이 인정되면서 전란은 최종적으로 종결되고 정홍은 본거지 산구(山口)로 귀환하였다. 귀환 후 우선은 영지의 안정 및 지배력 강화에 힘썼다. 아울러 축전에서 세력 회복을 꾀하던 소이씨를 공격하여 이를 물리쳤다. 1487년과 1492년에는 막부의 요청에 응하여 막부의 근강(近江) 원정에 군대를 파견하여 중앙에서의 대내씨 지위를 높이기도 하였다. 1494년 병이 악화되어 적자인 대내의흥(大內義興)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뒤 다음 해인 1495년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대내정홍이 조선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은 1473년(성종 4)이었다(『성종실록』 4년 8월 9일). 이해는 응인의 난의 두 당사자인 산명종전(山名宗全)·세천승원(細川勝元)이 사망하고 수습국면으로 접어든 때였다. 조선과의 통교시 정홍은 대체로 ‘방(防)·장(長)·섭(攝)·천(泉) 4주 태수 대내별가다다량정홍(大內別駕多多良政弘)’의 명의를 사용하였다. 조선과의 통교를 재개한 후에는 자주 사신을 파견하였고 대장경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474년(성종 5)의 서계 내용에는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성종실록』 5년 7월 27일) 이것은 고려시대인 1379년의 사건을 의미하였다[『고려사』 권114 「하을지전」].
그렇지만 1479년(성종 10) 정홍이 파견한 사자는 응인의 난으로 정홍이 본거를 비운 사이에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으며 그 기간 중 대내씨의 사자라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라 하였다(『성종실록』 10년 4월 21일).
이와 관련하여 정홍의 정식통교가 있기 전부터 대내씨 일족을 자처하는 대내교지(大內敎之)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왔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는 교지를 정홍의 숙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홍의 숙부 중 교지라는 이름의 사람은 없었다. 이 때문에 대내교지의 사신은 위사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정홍과 대립하였던 교행이 대내씨 가독의 명분으로 사자를 파견하였을 가능성 등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학회 편, 『왜구 위사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橋本 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東アジア通交圈と僞使問題』, 吉川弘文館, 2005.
- 石田晴男, 『應仁·文明の亂』(戰爭の日本史 9), 吉川弘文館, 2008.
- 松岡久人, 『大內氏の硏究』, 淸文堂出版, 2011.
- 須田牧子, 『中世日朝關係と大內氏』, 東京大學出版會,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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