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서(農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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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농서 |
한글표제 | 농서 |
한자표제 | 農書 |
관련어 | 『농가집성(農家集成)』, 『농사직설(農事直說)』, 농소(農疏), 농정(農政) |
분야 | 교육·출판/출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염정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농서(農書) |
채소와 나무의 재배 기술 등 농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사항을 정리한 책.
개설
농서(農書)는 농업생산 활동에 활용되던 농업기술을 정리하여 수록한 책이다. 농서 편찬 당대에 농업생산 활동에 채용되던 농업기술이 실려 있고, 또한 이전 시기에 개발되어 농사에 활용한 기술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농서를 분석하여 조선시대 농업생산 활동에 이용된 농업기술을 밝힐 수 있다.
농서를 넓게 정의하면 농업생산에 관계되는 모든 요소를 서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농업기술, 농업경영, 토지소유 등에 관련된 내용, 농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법(曆法)에 대한 설명, 기후적인 요인으로 인해 초래되는 재해(災害)에 대한 설명과 대책 등에 관한 저술도 농서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반면 좁은 범위에서 농서를 제한하면 기본적인 식량작물에 대한 재배기술과 기타 부수적인 채소, 의료식물 재배의 기술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는 저술로 한정할 수 있다.
농서는 실제 농업기술이 문자로 전환되어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농업기술의 보유자와 문자화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당대 농업 현실에서 가장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개발하여 이를 활용하던 노농(老農)과 이를 문자로 만든 사족(士族) 계층을 나누어서 파악해야 한다.
내용 및 특징
우리나라의 농서 편찬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에서 편찬된 농서를 수입하여 활용하였다. 고려왕조에서는 권농책을 수행하면서 중국에서 편찬된 농서를 이용하였다. 농서의 색채를 띠고 있는 『예기(禮記)』「월령편(月令篇)」을 활용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1세기에 송나라에서 고려에 요구한 서적 목록 가운데, 중국 한대(漢代) 범승지(氾勝之)가 지은 『범승지서(氾勝之書)』라는 농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중국 농서가 고려에 유입되어 농정(農政)에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중·후기에는 중국에서 간행된 『제민요술(齊民要術)』, 『잠서(蠶書)』 등이 활용되고 있었다.
고려말에 이르면 국내에서 중국 농서를 재간행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중국 원대(元代)에 편찬된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가 경상도 합천에서 재간행되었다. 1372년(고려 공민왕 21)에 국내에서 간행된 새로운 『농상집요』 판본을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라고 부르는데, 앞서 이암(李嵒)이 중국에서 가져온 『농상집요』를 대본으로 삼은 것이었다. 고려말 재간행된 『농상집요』는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주요한 참고 농서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태종대에 『농상집요』를 초록하여 이두로 번안한 농서인 『농서집요(農書輯要)』가 편찬되었다. 중국 농서를 그대로 이용하거나 초록하여 이용하는 사정이 크게 바뀐 것은 세종대의 일이었다. 조선의 풍토에서 유래한 농업기술을 수록한 농서로 1429년(세종 11)에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농사직설』은 조선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최초의 농서로서 커다란 의의를 지녔다. 하삼도(下三道) 관찰사들이 각각 정리하여 올린 농업기술을 정초(鄭招) 등이 정리한 것이 이 농서였다. 15세기 후반에 강희맹(姜希孟)은 금양(衿陽)에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다. 『금양잡록』은 지역의 고유한 농법을 정리한 지역농서(地域農書)라는 성격과 함께 개인의 저작물이라는 점에서 사찬농서(私撰農書)이기도 하였다. 앞서 태종대에 편찬된 『농서집요』와 세종대에 만들어진 『농사직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편찬된 관찬농서(官撰農書)였던 것과 대비된다.
1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이르러 『농사직설』과 『금양잡록』이 갖고 있는 아쉬움과 한계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단계의 농서 편찬이 진행되었다. 그러한 농서 편찬의 흐름을 분석하면 대략 세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노농(老農)의 농업기술, 즉 노농의 경험, 지혜를 보다 본격적으로 정리한 농서가 편찬되면서 문자로 정리된 농서의 내용이 실제의 농법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국지적인 기후와 토양 조건, 그리고 지역적인 농사경험에 근거한 이른바 지역농법(地域農法)이 보다 적극적으로 농서 편찬에 반영되게 되었다. 농법의 지역성이 비로소 문자화된 농서에 수록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곡물 중심의 경작법 서술에서 벗어난 채소와 과수 등 농업생산, 특히 농민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여러 생산물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을 포괄한 종합농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16세기 후반 이후 농업기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관료와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각 지역의 특색을 담고 있는 지역농법을 정리하여 지역농서를 편찬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을 보면 전라도 옥과(玉果) 지역에서 유팽로(柳彭老)가 『농가설(農家說)』을 편찬하였고, 경상도 상주(尙州) 지역에서 고상안(高尙顔)이 각각 『농가월령(農家月令)』을 편찬하였다. 『농가설』은 월별로 농가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여 지시하는 등 월령식(月令式) 농서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농가월령』은 아예 절기별로 농작업을 지시하는 월령식 농서 형식을 그대로 띠고 있었다. 이렇게 개인이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농법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농업기술의 지역성을 담은 지역농서를 편찬하는 작업은 이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7세기 중반에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신속(申洬)은 『농가집성(農家集成)』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여 효종에게 올렸다. 이 책은 『농사직설』과 세종의 권농교서(勸農敎書), 주자(朱子)의 권농문(勸農文), 『금양잡록』,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등을 한데 모아 편찬된 것이었다. 신속은 『농가집성』을 편찬하기에 앞서 『농사직설』을 증보하여 공산(公山, 公州)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농가집성』에서 『농사직설』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증보하였는데, 17세기 중반 이전부터 현실 농법으로 채택되어 실제 농업생산 활동에 적용되고 있던 농업기술을 정리하여 초록(抄錄)한 것이었다. 또한 『농사직설』의 증보에 종목화법(種木花法)이라는 항목을 추가하면서 농서 편찬이 채소와 과수를 포함한 다양한 농업생산물의 경작법, 재배법을 포괄해나가야 한다는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홍만선(洪萬選)이 편찬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단순한 농서가 아니라 산림에 거처하는 처사(處士)가 익숙하게 알아야 할 여러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는 관직생활의 상당 부분을 외방에서 목민관(牧民官)으로 지내면서 산림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의 하나로 『산림경제』를 편찬하였다. 『산림경제』「치농(治農)」은 식량작물의 생산기술을 담고 있는 구체적인 농서에 해당하였다. 이 부분의 서술을 살펴보면 두 가지 서로 성격이 다른 계통에서 인용한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산림경제』 이전에 편찬된 여러 농서로부터 인용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농서가 아닌 견문(見聞)이나 전문(傳聞)에 의거하여 수합한 속방(俗方)을 기록한 부분이다. 그리고 『산림경제』「치농」에 인용된 많은 농서 가운데 『농사직설』 즉 신속의 『농가집성』에서 증보된 『농사직설』이 제일 많은 인용 건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18세기 중반 이후 『산림경제』를 증보한 농서, 이른바 ‘산림경제증보서(山林經濟增補書)’가 연이어 편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이다. 의관(醫官)이었던 유중림은 1761년(영조 37) 내의원의관으로서 세손이던 정조(正祖)의 병을 치료하는 데 주요한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증보산림경제』에서 『산림경제』를 대대적으로 증보하였다.
1798년(정조 22) 11월 정조가 「권농정구농서윤음(勸農政求農書綸音)」을 반포하면서 조선의 농정(農政)을 혁신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농서를 편찬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응지농서(應旨農書)를 올렸다. 정조가 추진한 새로운 농서의 명칭을 ‘농서대전(農書大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농서대전’ 편찬 작업은 1798년 12월 이후 응지농서에 대한 검토를 어느 정도 일단락지은 1799년 4월 하순 이후 본격화되었다. 이때 검토한 새로운 응지농서의 주요 내용을 신편(新編)하는 농서에 상세히 기재하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지고 있었다. ‘농서대전’의 편찬 추진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행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인물은 이서구(李書九)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추진한 ‘농서대전’ 편찬은 실제 자료를 정리하는 단계에서 중단되어 버렸다. 이후 본격적인 초고를 만드는 작업으로는 제대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국가적인 농서 편찬 사업이라는 점, 지역농서에 해당하는 응지농서를 편찬의 기본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선후기 농업기술의 발달을 총괄하여 집대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농서 편찬은 다양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전라도 능주(綾州)에서 가문의 농법을 바탕으로 지역농법을 정리한 농서가 한석효(韓錫斅)가 지은 『죽교편람(竹僑便覽)』「치농편(治農篇)」이었다. 그는 지역적인 농사 관행을 정리하면서 집에서 내려오는 전래의 ‘농서’인 『가훈치농장(家訓治農章)』”에 의거하여 이 지역에 적당한 기경법(起耕法)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죽교편람』 「치농편」에 기술된 벼농사 기술은 강한 지역성을 지닌 것이었다.
한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종합적인 농서의 집대성 작업이 이루어졌다. 1834년(순조 34) 호남순찰사(湖南巡察使)로 노령(蘆嶺) 남북(南北)을 돌아보면서 감저(甘藷) 즉 고구마 재배를 통한 구황(救荒)의 달성을 목표로 그때까지 알려진 감저재배법(甘藷栽培法)을 종합 정리하여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기도 한 서유구(徐有榘)는 달성서씨(達成徐氏) 집안의 일원이었는데, 아버지인 서호수(徐浩修)가 『해동농서(海東農書)』를 편찬한 것을 비롯하여 할아버지인 서명응(徐命膺)이 『본사(本史)』라는 농서를 편찬한 것에 이르기까지 3대가 모두 농서를 편찬하여 농학(農學)을 가학(家學)으로 삼고 있었다. 서유구가 여러 농서를 집대성하고 종합적인 영농의 이모저모를 끌어모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다. 서유구가 농업기술 가운데 역점을 두고 제언한 것은 바로 농법 개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행포지(杏蒲志)』에 수록된 도종(稻種)의 정리 작업과 같이 당대의 농법을 종합 정리하고, 지역적인 벼 품종의 정착을 소상하게 소개하면서 지역농법의 정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사실 가장 조선적인 입장에서 농업기술의 종합을 완수하려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변천
조선의 농서 편찬은 서양 농업과학기술이 도입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서양농학의 본격적인 도입은 개항기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서양 농업과학기술의 일부가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명나라 서광계(徐光啓)가 편찬한 『농정전서(農政全書)』가 조선의 농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농정전서』의 내용 속에 유럽의 수리기술을 정리한 『태서수법(泰西水法)』을 참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 최한기 등의 농서에 그러한 서양 농학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개항기 이후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 일행에 포함되어 있던 안종수(安宗洙)가 서양 농학을 조선에 도입하여 농서를 편찬하였다. 안종수는 세관조사 담당이던 조병직(趙秉稷)의 수행원이었는데, 일본의 신진 농학자를 만나 서양의 실험농학을 익히고 이를 가져왔다.
안종수는 일본에서 돌아와 1881년 12월 4권의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완성하였다. 서양농학을 일본학자를 통해 조선에 도입한 것이었다. 『농정신편』은 1885년 여름에 광인사(廣印社)에서 초판 400부가 인쇄되어 각도 행정기관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다.
안종수가 『농정신편』을 편찬한 이후 서양 농학을 도입한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다. 1886년(고종 23) 정병하(鄭秉夏)는 『농정촬요(農政撮要)』를 편찬 간행하였다. 그는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농서를 편찬하였다. 『농정촬요』는 일본 농서를 많이 참고하면서 서양 농학 내용도 소개하고 있었다. 1888년 지석영(池錫永)은 『중맥설(重麥說)』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다. 우두(牛痘)로 유명한 의학자였던 지석영이 맥류 재배에 관한 농서인 『중맥설』을 편찬한 것이다. 이후 1910년까지 국내에서 편찬된 서양 농업과학기술 내용을 소개한 농서는 총 20여 종에 달한다.
의의
조선시대에 편찬된 여러 농서를 분석하여 당시 활용되었던 농업기술을 찾아내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농서는 당대 현실의 농업기술을 문자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농서는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편찬된 것이었다.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보급하고, 기존의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개량하려는 입장에서 편찬되었다.
참고문헌
- 金榮鎭, 『農林水産 古文獻備要』,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3.
- 金榮鎭, 『朝鮮時代前期農書』,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4.
- 金容燮, 『朝鮮後期 農學의 發達』, 韓國文化硏究叢書 2,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0.
- 金容燮, 『朝鮮後期農學史硏究』, 一潮閣, 1988.
- 김영진·이은웅, 『조선시대 농업과학시술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李盛雨, 『韓國食經大全』, 鄕文社, 1981.
- 염정섭, 「조선시대 農書 편찬과 農法의 발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宮嶋博史, 「李朝後期農書の硏究」, 『人文學報』43, 京都大 人文科學硏究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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