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훤(南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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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9년(광해군 1)∼1656년(효종 7) = 48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경상도⋅황해도 감사(監司)와 승지(承旨)이다. 자(字)는 백도(伯圖)이고, 호(號)는 창명(滄溟)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남두첨(南斗瞻)이고, 어머니 한씨(韓氏)는 한응인(韓應寅)의 딸이다. 남병사(南兵使) 남응운(南應運)의 현손이고, 병조 참판(參判)남이신(南以信)의 손자이다. 북병사(北兵使) 남익훈(南益熏)의 아버지이고, 병조 판서(判書)남태회(南泰會)와 이조 판서남태제(南泰齊)의 증조부다.

인조 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사마방목>]

1636년(인조 14) 병자(丙子)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문과방목>]

1641년(인조 19)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1642년(인조 20)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43년(인조 21)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1646년(인조 24)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 5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어, 효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승정원에서 승지로 활동하며 효종의 <북벌(北伐) 계획>을 도왔다.

1650년(효종 1)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가, 소환되어,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1655년(효종 6)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56년(효종 7) 감사로 재임 중에 감영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48세였다.

후손

부인 권씨(權氏)는 권현(權晛)의 딸이다.[<방목>]

그의 7형제 중에서 특히 창명(滄溟) 남훤南翧)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창명공파(滄溟公派)를 이루었다.

장남 남성훈(南聖熏)은 진사(進士)로서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차남 남경훈(南景熏)은 진사(進士)였고, 삼남 남상훈(南尙熏)은 진사로서 성주목사(聖主牧師)를 지냈고, 사남 남익훈(南益熏)은 문과에 급제하여, 북병사(北兵使)를 지냈고, 오남 남오훈(南五熏)은 진사로서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고, 육남 남치훈(南致熏)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參判)을 지냈고, 칠남 남지훈(南至熏)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남훤(南翧)은 7형제 중에서 셋째아들인데,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효종의 신임을 받아서 승지와 두 도(道)의 감사를 역임하였다. 또 남훤은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7형제가 모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그 중에서 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종2품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므로 남훤의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여, 의령 남씨 중에서 창명공파(滄溟公)파를 이루어 명가(名家)임을 자랑한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지(國朝人物誌)』
  • 『동명집(東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주집(晩洲集)』
  • 『목민심서(牧民心書)』
  • 『부상록(扶桑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당집(月塘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자암집(紫巖集)』
  • 『죽당집(竹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