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南褒)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59년(세조 5)∼1540년(중종 35) = 82세.]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공조 좌랑(佐郞)이다. 자(字)는 사미(士美)이고, 호(號)는 지지당(知止堂)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경기 파주 적성(積城) 감악산(紺岳山)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掌令)남치신(南致信)이고, 어머니 진주하씨(晉州河氏)는 호군(護軍)하비(河備)의 딸이다. 훈구파(勳舊派)의 영수인 영의정남곤(南袞)의 형이다. 증조부 남을진(南乙珍)은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남재(南在)⋅남은(南誾) 형제의 아버지 남을번(南乙蕃)과는 형제간이었으므로, 남포⋅남곤 형제는 훈구파 집안 출신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89년(성종 20)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502년(연산군 8)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4세였다.[<문과방목>] 연산군 말년에 공조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7월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소격서 령(昭格署令)에 임명되었다.

1508년(중종 3)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때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509년(중종 4) 예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이때 중종이 사림파(士林派) 조광조(趙光祖) 등을 등용하여 정치를 개혁하려고 하자, 훈구파(勳舊派)가 이에 반대하였다. 반정(反正) 공신(功臣) 박원종(朴元宗)을 중심으로 무관 홍경주(洪景舟)와 문관 남곤(南袞) 등이 훈구파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다. 조광조의 사림파는 주로 대간(臺諫)에 포진하고, 반정 공신들의 비리를 공격하였다.

1514년(중종 9) 사림파가 장악한 사헌부에서 반정(反正)할 당시에 반정군이 궁중에 침입하였을 때 남포 등이 연산군의 궁녀들이 사용하던 개구분(蓋具盆: 뚜껑 있는 화분) 1부(部)와 세수 대야와 요강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고 공격하였다.[『중종실록』 9년 11월 11일 2번째기사] 남포가 훈구파의 중진 남곤(南袞)의 형이었기 때문이다. 남포는 작은 일이었지만, 부끄러워하여 인피(引避)하였다.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남포(南褒) 등의 죄는 장오(贓汚: 뇌물죄)에 해당하므로 관직을 파면하고 추고(推考)하도록 하소서.”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남포는 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으나, 남포는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사림파가 반정 공신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려다가, 훈구파의 반발을 크게 샀다.

1519년(중종 14) 10월에 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사림파 조광조(趙光祖) 일당을 일망타진하였다. 남포는 훈구 집안 출신이었으나, 동생 남곤(南袞)과는 달리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홍경주와 남곤 등이 정권을 잡고 조광조 등을 죽이고 사림파를 몰아낸 다음에 훈구파 중심의 낡은 정치를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다. 남포는 동생 남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적성(積城)으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1520년(중종 15) 혜민서 교수(敎授)에 임명되었고, 1523년(중종 18) 봉상시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동생 남곤(南袞)은 영의정이 되어 세도(勢道)를 누렸으나, 형 남포는 일부러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항상 헌갓에 떨어진 무명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유람하였는데,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소요자(逍遙子)라고 일컫고, 가는 곳마다 자기의 성과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1540년(중종 35) 6월 17일에 적성(積城) 감파동(紺波洞)에서 노병(老病)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82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불의(不義)를 보고 참지 못하였다. 남포는 벼슬이 홍문관 전한(典翰)과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 이후에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의 일에 뜻이 없어서 청맹(靑盲)이라고 일컫고 벼슬하지 않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岳山)에 들어가서 숨어서 살았다.

1521년(중종 16)에 비로소 적성(積城) 감파동(紺波洞) 재사(齋舍)에 돌아와서 지내다가, 1540년(중종 35)에 돌아가니, 향년이 82세였다. 그가 병이 나자, 그의 아들 장령(掌令)남정진(南廷縉)이 그때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다가, 임소로부터 적성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를 모셨다. 남포가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네가 여덟 번 고을 벼슬을 제수 받아서, 세 번은 사양하고, 다섯 번은 나가서 부임한 것은, 부모가 있어서 봉양하려고 뜻을 굽힌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토지와 집이 있어서, 바람과 비를 가릴 수 있고, 죽이나 밥으로 생계도 이을 만하다. 내가 죽은 뒤부터는 너는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 또 나의 묘갈(墓碣)에는 다만 공조 좌랑(佐郞)의 옛 직함만을 써라. 홍문관 전한⋅직제학은 내가 조정에 나아가서 부임하지도 않았으니, 죽어서 어찌 묘지(墓誌)에 쓸 수 있겠는가.”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9]

명종이 일찍이 남포와 그 아들 남정진의 청렴결백에 대하여 말하기를, “고 직제학남포가 깨끗하게 벼슬에서 물러나서 한 평생 절개를 지킨 것은 이미 훌륭하였으며, 그 아들 남정진도 아버지와 같이 벼슬에서 물러나서 청렴결백하게 사니, 비록 옛날 어진 관리라고 하더라도 이들보다 못하였을 것이다.”하고, 특별히 아들 남정진에게 표리(表裏: 옷의 안감과 겉감) 1벌을 하사하였다.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이 남포가 동생 남곤(南袞)의 훈구파(勳舊派) 세도 정치를 피해서 숨어산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직제학남포는 청맹(靑盲)이라고 일컫고 벼슬하지 않은 것은 중국 송나라 왕안례(王安禮)가 형 왕안석(王安石)의 신법파(新法派) 세도 정치를 피해서 숨어산 것과 같다.” 하였다.[묘갈] 그 뒤에 선초 초기에 사림파가 정권을 잡자, 죽은 남곤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 직첩을 빼앗아버렸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경기 파주 적성(積城) 자암동(紫巖洞)의 언덕에 있는데, 쌍계(雙溪)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 있다.[『쌍계유고(雙溪遺稿)』 권6]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현감(縣監)정유지(鄭有智)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외아들 진사(進士)남정진(南廷縉)은 음보(蔭補)로 사헌부 장령(掌令)⋅곡산부사(谷山府使)를 지냈고, 장녀는 군수(郡守)민종건(閔宗騫)에게, 차녀는 참봉(參奉)조극공(趙克恭)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 남헌(南幰)은 참봉(參奉)을 지냈다.[묘갈] 부인 정씨(鄭氏)는 『소학(小學)』에 정통하고 가례(家禮)를 잘 알아서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 부인 정씨가 부군 남포보다 26년 먼저 돌아갔으나, 부군 남포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산집(鼓山集)』
  • 『금릉집(金陵集)』
  • 『매산집(梅山集)』
  • 『봉서집(鳳棲集)』
  • 『송재집(松齋集)』
  • 『쌍계유고(雙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