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회(南泰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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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06년(숙종 32)∼1770년(영조 46) = 65세.]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형조 판서⋅도승지(都承知)이고, 시호(詩號)는 헌민(獻敏)이다. 자(字)는 성제(聖際)이고, 호(號)는 자암(紫巖)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충청도 충원(忠原) 출생으로서 거주지는 서울 청파리(靑坡里)이다. 아버지는 의빈부 도사(都事)남근명(南近明)이고,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부사(府使)이만봉(李萬封)의 딸이다. 예조 판서남태기(南泰耆)의 동생이고, 대사헌(大司憲)남태저(南泰著)의 형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33년(영조 9)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736년(영조 12)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1747년(영조 23)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그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1748년(영조 24)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때 대간(臺諫)에서 발론(發論)할 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연명하여 아뢰는 계본(啓本)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때 장령(掌令)권익수(權益秀)가 아뢰기를, “지평남태회가 재숙(齋宿)한다고 칭탁하고 합계(合啓)의 간통(簡通: 계본)에 근실(謹悉)이라고 쓰지 않았으니, 파직시키소서.”하니, 영조가 장령권익수와 지평남태회를 모두 삭출(削黜)시키도록 명하였다.[『영조실록』 24년 4월 6일 4번째기사]

1749년(영조 25)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1751년(영조 27)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

1752년(영조 28) 홍문관으로 옮겨서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 그보다 앞서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다가 죽음을 당한 소론(少論) 대신(大臣)들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였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광조(韓光肇)⋅이중조(李重祚) 등과 함께 유배당하였다.[『영조실록』 28년 10월 22일 2번째기사]

1752년(영조 28) 다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753년(영조 29)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1754(영조 30)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고, 다시 사헌부 헌납으로 옮겼다.

1755년(영조 31)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어,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다. 그해 4월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그해 7월에 도승지(都承知)로 영전되었다.

1757년(영조 33)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758년(영조 34)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그때 왕세자(王世子: 사도 세자)가 대리청정하였는데, 왕세자가 아버지 영조를 몹시 두려워하자, 도승지남태회가 울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에게 항상 엄격한 위엄을 가지고 주로 대하셨기 때문에 세자가 지나치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동궁께서 전하가 진전(眞殿)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서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의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한 가운데 이와 같이 초조하고 심려한다면, 어찌 민망하고 절박하지 아니하겠습니까.”하니, 영조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동궁이 어찌 이를 알았다는 말인가.” 하였다. 이때 도승지남태회는 영조와 왕세자 간의 불화를 몹시 염려하여, 건강이 불편한 세자에게 부드럽게 대하기를 권하였다.[『영조실록』 34년 7월 8일 2번째기사]

1762년(영조 38)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

1763년(영조 39)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764년(영조 40)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1765년(영조 41) 특별히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767년(영조 43)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판서로 옮겨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영조가 육상궁(毓祥宮: 인조 생모의 묘소)에 나아가 예를 거행하고 환궁할 때에 병조 판서남태회가 안국동(安國洞)의 길은 매우 좁다고 하여 종루(鍾樓: 종로)를 거쳐 갈 것을 청하니, 영조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칭찬하고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영조실록』 43년 9월 11일 2번째기사]

1768년(영조 44)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판 거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

1769년(영조 45)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윤을 거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어,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1770년(영조 46)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서 정양하다가, 그해 5월 11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남태회는 키가 크고 몸이 풍만하고 수염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생각이 넓고 깊어서 도량이 아주 컸다. 어린아이 때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에도 지혜와 의기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아버지 남근명이 기특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하였고, 여러 어른들도 그를 한번 보고 모두 장차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다.[시장]

1706년(숙종 33) 1월 3일에 서울 청파리(靑坡里) 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과천현감(果川縣監)남근명(南近明)과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 5형제 중에서 넷째아들이었다. 맏형 남태보(南泰普)는 진사(進士)에 그쳤지만, 나머지 4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영조의 측근이 되어 정승과 판서에 이르렀는데, 둘째형 남태기(南泰耆)는 예조 판서를 지냈고, 셋째형 남태계(南泰堦)는 병조 좌랑을 지냈으며, 동생 남태저(南泰著)는 대사헌을 지냈다.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갔기 때문에 평생토록 어머니를 애모(哀慕)하는 마음이 한결같았으며, 아버지가 돌아갈 때 병중에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제철이 아니어서 포도를 구해서 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 집 후원에 손수 포도를 가꾸어서 기일(忌日)에 그 포도를 따서 제사상에 올렸다. 맏형 남태보를 마치 돌아간 아버지처럼 섬겼는데, 1년에 한 차례 맏형을 반드시 자기 집에 모셔가서 맛있는 음식을 싫건 대접하였다.[시장]

남태회는 기품이 넓고 말씨가 유쾌하여 남과 이야기할 때에 가슴 속의 생각을 곧잘 털어놓았다. 일찍이 남태회에게 죄를 지은 아전이 있었는데, 남태회가 그 관부의 장관으로 부임하자, 그 아전이 무서워서 도망하였으나, 남태회가 사람을 시켜서 그 아전을 불러와서 일을 보도록 하였지만, 그 전에 지은 죄를 일절 따져서 물어보지 않았다. 남태회가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 고위급 무관[韎韋]들이 문전에 찾아와서 인사 청탁을 하는 자가 많았는데, 비록 그 청탁을 그대로 들어줄 수 없었지만, 그들을 잘 대접하여 각기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에, 인사 발표가 나오더라도 사람들이 자기가 잘되고 잘못되는 것을 따져서 헐뜯는 자가 거의 없었다. 남태회가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노자(路資)로서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갔는데, 종자(從者)들이 은화를 모두 꺼내서 나누어 가지고 중국 물화를 사는 데에 다 써버리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수레를 빌리거나 땔감을 사는 데에 다 써버렸습니다.”고 하니, 남태회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러한가.”하고, 따져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 남태회를 ‘훌륭한 사람[長者]’이라고 칭찬하였다.[시장] 당시 사신을 따라가는 종자(從者)들은 중국에 가서 중국의 비단과 사치품을 사와서 국내에서 다시 팔아서 큰 이익을 챙기던 장사치가 많았던 것이다.

남태회는 퇴청(退廳)하여 집에 있을 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주역(周易)』과 『강목(綱目)』 등의 책을 읽기를 좋아하였다. 때때로 벼슬하지 않는 한사(寒士)와 노생(老生)들과 함께 경전(經典)의 심오한 글 뜻을 해석하려고, 글귀를 두고 논난(論難)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집에 있으면서 꽃을 심고 학(鶴)을 기르며, 서실(書室)에 ‘옥천유거(玉泉幽居)’, 또는 ‘용문별업(龍門別業)’이라는 편액(扁額)을 스스로 쓰서 붙이고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나서 우거(寓居)할 생각을 하였다.[시장]

1770년(영조 46) 5월 11일에 전 판서남태회가 돌아가자, 영조가 매우 슬퍼하며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남태기 3형제가 나를 섬긴 지 몇 해이던가. 두 사람은 정경(正卿)이 되었고 한 사람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었는데, 남태기는 먼저 죽었고 그 아우 남태회는 벼슬이 팔좌(八座: 판서)의 반열에 이르렀다. 나는 일찍이 그의 늠름한 풍채(風采)를 마음에 든든하게 여겼는데, 부음(訃音)이 이렇게 갑자기 이를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상례(喪禮)의 범절(凡節)을 전례(典禮)에 의하여 거행하라. 제문(祭文)을 지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어제 그 사위가 입시한 것을 보았는데, 형제 가운데 나이 찬 아들이 있으면 불러서 임용하여, 나의 사랑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맏사위 홍검(洪檢)이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영조가 그의 입직(入直)을 바꾸어 상가(喪家)로 나도록 허락하였다.[『영조실록』 46년 5월 11일 2번째기사]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근군(楊根郡) 북쪽 고로곡(古老谷)에 있다. 1820년(순조 20)에 시호를헌민(獻敏)이라고 내려주었는데, 그때 그 후손이 되는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금릉집(金陵集)』 권19]

첫째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중추부 첨지사(簽知事)한척(韓滌)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고, 둘째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사인(士人) 조태언(趙台彦)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남채로(南綵老)이고, 장녀는 참판(參判)홍검(洪檢)의 처이고, 차녀는 권세구(權世構)의 처이고, 삼녀는 임희인(任希仁)의 처이고, 사녀는 대사간(大司諫)최헌중(崔獻重)의 처이다. 손자는 남이채(南履綵)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암유고(可庵遺稿)』
  • 『강한집(江漢集)』
  • 『근재집(近齋集)』
  • 『금릉집(金陵集)』
  •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 『백일헌유집(白日軒遺集)』
  • 『번암집(樊巖集)』
  • 『성재집(性齋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우천집(牛川集)』
  •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
  • 『청성잡기(靑城雜記)』
  • 『풍서집(豐墅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