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규년(南虬年)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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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규년 |
한글표제 | 남규년 |
한자표제 | 南虬年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인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영로(靈老)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6년(연산군 2) |
본관 | 고성(固城) |
주거지 | 서울[京] - 경기 양주(楊州) |
증조부 | 남금(南琴): 문과 급제, 병조 참의(參議), 강원도 감사(監司) |
조부 | 남익문(南益文); 진사(進士) |
부 | 남세주(南世周); 문과 급제, 홍문관 전한(典翰)⋅사헌부 지평(持平) |
모_외조 | 전주이씨(全州李氏); 서성 부정(瑞城副正) 이덕식(李德植)의 딸 |
형제 | (형) 남봉년(南鳳年); 군수(郡守) |
처_장인 | 문화유씨(文化柳氏); 유희저(柳希渚)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규년(南虬年) |
총론
[1496년(연산군 2)∼졸년 미상.] 조선 중기 중종~인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정랑(正郞)⋅예조 좌랑(左郞)이다. 자(字)는 영로(靈老)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경기 양주(楊州) 출신으로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홍문관 전한(典翰)남세주(南世周)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서성 부정(瑞城副正)이덕식(李德植)의 딸이다. 병조 참의(參議)남금(南琴)의 손자이고, 사간원 헌납(獻納)남세담(南世聃)의 조카이다. 김안로(金安老)의 일파로 지목되어 중종 말엽에 수난을 많이 겪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19년(중종 14)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사마방목>] 그해 10월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사림파(士林派)의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몰락하는 것을 본 뒤, 벼슬길에 나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시문(詩文)을 지으며 경서(經書)를 읽는 데에 몰두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 남세주(南世周)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에 의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남규년도 그의 형 남봉년(南鳳年)과 함께 수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에 세상이 안정되자, 1538년(중종 33) 알성(謁聖)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3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539년(중종 34) 예조에서 전 검열남규년에게 『황화집(皇華集: 중국 명나라 사신과 시를 창화한 시집)』을 나누어 주고 김인후(金麟厚)⋅장옥(張玉) 등과 함께 운(韻)에 따라 시를 짓는 연습을 하게 하였는데, 장차 중국 명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 우리나라 영접사(迎接使)를 도와서 중국 사신과 시(詩)를 지어서 창화(唱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예조에서 젊은 문사(文士) 가운데 단지 5명을 선발하였는데, 남규년이 뽑혔던 것을 보면, 그가 시를 잘 지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뒤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치고, 1541년(중종 36) 예문관 봉교(奉敎)에 임명되었다. 그때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사간원에서 남규년이 어머니 상례 때 가끔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이나 담복(禫服)을 입고 사람들을 만났다고 탄핵하여 체직(遞職)되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소윤(少尹)의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남규년을 미워하여, 겸춘추(兼春秋)에서 체직시켰던 것인데, 일찍이 남규년이 생원시(生員試)의 대책(對策)에서 김안로(金安老)를 지지하는 글을 지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안로는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몰아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1542년(중종 37) 예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윤원형의 소윤파 대간(臺諫)에서 세 차례나 서경(署經)을 하지 않았으므로, 중종이 마침내 체직시켰다.[『중종실록』 37년 2월 12일 2번째기사]
1544년(중종 39) 외직으로 나가서 경상도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었다. 그때 고을 사람 김응해(金應海)와 이헌(李軒)이 도망한 노비를 둘러싸고 소송을 벌렸는데, 현령남규년이 이 노비 소송 사건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과정에, 피고 이헌이 경상도 감사이언적(李彦迪)을 무고하므로, 현령남규년이 이헌에게 세 차례나 가혹하게 형벌하며 심문하다가, 18일 만에 피고 이헌이 죽고 말았다. 이에 이헌의 아들 이부(李阜)가 사헌부에 정장(呈狀)하여, 의성현령남규년을 고발하였고, 또 경상도 감사이언적은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사직서를 올렸다. 이에 중종이 사헌부로 하여금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게 하고, 감사이언적과 현감남규년이 이헌에게 세 차례나 가혹하게 형문(刑問: 형벌하며 심문하는 것)하였다고 하여, 두 사람을 모두 파직(罷職)시켰다.[『중종실록』 39년 4월 29일 5번째기사]
인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마침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사행(使行)을 이끌고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으나, 대간(臺諫)에서 반대하기를, “형조 정랑남규년이 이제 동지사 서장관(書狀官)에 임명 되었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이 서장관에 맞지 않다고 하니, 체임하소서.”하니 인종이 이에 따라서 서장관을 바꾸었다.[『인종실록』 1년 5월 28일 1번째기사] 소윤(少尹)의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대간을 움직여서 남규년의 품행을 문제로 삼아서 남규년의 서장관 임명을 철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대윤(大尹)의 윤임(尹任)은 인종을 보호하려고 사림파(士林派)와 손을 잡고, 소윤의 윤원형 일파와 대립하였는데, 그 앞서 중종 말년에 김안로(金安老)도 인종을 보호하려고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대립하다가 몰락하였던 것이다. 남규년은 사림파의 거두 이언적(李彦迪)을 받들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소윤과 싸웠으나, 인종이 즉위한 지 체 1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남규년은 벼슬길이 막혀서, 고향 양주(楊州)에 돌아가서 은거하다가, 돌아갔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고지식하고 정직하여, 곧잘 반대파의 비난을 받았다.
묘소와 후손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유희저(柳希渚)의 딸이다.[<방목>]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