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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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에 땔나무와 숯 등의 땔감을 조달한 공인.

개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현물로 징수되던 공물이 대동미·포·전으로 바뀌어 납부되었다.공인은 정부로부터 대동미·포·전을 공가로 지급받아 관청의 수요품을 제조하거나 구입하여 납부하였다. 공인의 공물 상납은 정기적으로 조달하는 원공(元貢)과, 원공만으로는 부족하거나 공안(貢案)에 없는 새로운 물품을 조달하는 별무(別貿)로 나뉜다. 공인도 원공공인과 별무공인, 공가도 원공가와 별무가로 나뉜다. 원공은 선혜청, 별무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대동법 실시에 따라 기인의 신역(身役)도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지급받아 서울 공계(貢契) 등을 통해 물종이 상납되는 경작공(京作貢) 형태로 전환되었다. 기인은 공조(工曹)산택사(山澤司)에 소속된 공인으로, 상납 물종이 선혜청의 원공에 포함된 원공공인이다. 『만기요람』의 선혜청 57공(貢) 가운데에도 기인이 포함되어 있다. 기인의 권리를 매매하는 문서에 ‘기인공방(其人貢房)’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통해 기인은 공방이란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기인공방에 소속된 계원 자녀끼리 혼인관계를 맺은 경우도 있다. 기인 공인권은 조선후기에 중요한 매매 대상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기인의 역은 해당 읍의 향리 수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컸다. 경기는 향리 90명에 1명, 강원도와 황해도는 70명마다 1명을 두고, 경상·전라·충청도는 향리 50명에 1명을 차정하였다. 이처럼 기인의 분정(分定)은 고정화되어 있어서, 향리가 감소하면 그만큼 남아 있는 사람의 부담이 증가하였다. 기인이 입역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가포(價布)의 형태로 거두었는데, 처음에는 향리나 관속(官屬)에게 거두어들이다가 점차 일반민에게 전가되었다. 이로 인해 기인이 입역하는 데 드는 가포를 징수하는 것은 새로운 민역(民役)으로 인식되었다. 각 도의 폐단 가운데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할 정도도 민에게 지워진 가포 징수의 부담이 막대하였다. 여기에 공조의 낭관이나 아전이 방납인(防納人)과 결탁하여 기인가포를 방납하는 폐단도 야기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기인가포를 논·밭 등의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징수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 갔다.

1624년(인조 2) 강원도에 대동법이 실시될 때, 대동세미 속에 기인역가가 포함되었다. 이후 기인역가는 도마다 대동세에 포함되어 상납되었다. 이로써 공가를 받고 땔감을 조달하는 시탄공인(柴炭貢人)인 기인이 출현하게 되었다.

내용

『경국대전』 공전에는 경역리(京役吏)에 대한 규정이 있다. 경역리는 서울에 머물면서 서울에 관한 지방관청의 업무를 대행하는 향리란 뜻이다. 이 경역리는 기인을 가리킨다.

경기는 향리 90명, 강원도·황해도는 각 70명, 충청도·전라도·경상도는 50명마다 1명씩을 정하여 총 332명의 기인이 입역(立役)하였다. 이들이 해마다 차례로 서울에 오면 공조에서 여러 관청에 나누어 배정하여, 숯과 땔나무를 준비하게 하였다. 332명 가운데 233명은 사재감, 99명은 선공감에 배속되었다. 사재감에 배속된 기인은 1인당 하루에 소목, 즉 땔나무[燒木] 57근, 2일마다 뉴거(杻炬), 즉 싸리나무홰[杻炬] 1개를 납입하였다. 선공감에 배속된 기인은 1인당 하루에 숯 5두 5승을 납입하였다. 기인 대립가(代立價)는 한 달에 면포 5필이었다. 이처럼 기인은 조선전기에는 도별로 향리 수에 따라 입역해야 할 기인의 수가 정해졌으며, 이들은 경역리로서 상경하여 땔감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대립제가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기인은 공물주인, 즉 공인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때 기인은 땔나무·숯·싸리나무홰·싸리나무 등을 조달하는 공인의 신분을 띠었다. 기인은 공조 산택사(山澤司) 소속으로, 시탄공물주인이면서 동시에 그 공물명을 가리키는 용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기인은 공시탄인(供柴炭人)·공시탄자(供柴炭者)·공물공시목자(貢物供柴木者)·기인공물주인·시탄공물주인·시탄공인·공조기인 등으로 불렸다.

이로써 조선후기 기인은 공인 중에서도 각처의 제향(祭享)이나 궐내 각 전궁, 그리고 여러 관청에 시탄공물을 조달하는 원공공인을 일컬었다. 기인역에 대한 가포의 총액이 인조 때 많은 경우에는 연간 35,000필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당대 기인 수가 326명으로, 이들은 1인당 110석을 받는데 1년 받는 공가는 무려 35,000여 석에 이른다고 하였다. 순조 때에 편찬된 『만기요람』에서도, 1년에 지급되는 기인 공가의 총액은 38,721석 13두로 나타났다. 그중 원공이 38,437석 13두, 이문원미(摛文院米)가 162석 6두, 강화미(江華米)가 121석 9두였다. 이 가운데 이문원미와 강화미는 별무가미로 호조에서 지급한 것이다.

이 공가 총액은 기인 1인이 1년에 조달해야 하는 땔감 20,520근, 탄 132석, 뉴거 6,000자루, 뉴목 6,000속에 대한 비용이다. 땔감 20,520근, 숯 132석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하루 소목 57근, 탄 5두 5승을 360일로 잡고 계산한 수치였다. 기인에게 지급되는 공가는 선혜청 57공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로, 두 번째인 제용감(濟用監)의 17,395석에 비해 2배 이상이나 되었다.

변천

기인은 고려초에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향리 자제를 서울로 데려와 볼모로 삼으면서, 그 출신 지역 일에 대한 고문으로 삼았던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고려말에는 원래 임무와는 달리 성격이 변질되어, 여러 잡역을 담당하는 잡역부(雜役夫)로 전락하였다. 기인에게 부과된 역이 과중하여 도망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자, 고려말에는 이 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조선초 기인제도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정종 때는 기인 수를 조정하고, 중앙관청의 땔감 수요를 줄이도록 하였다. 태종 때는 땔나무를 수납하는 법을 고쳐서, 경기도가 공납하는 땔나무 1,935,000근을 면제해 주고, 기인 103명을 증원하여 땔나무 공급을 담당하는 소목역(燒木役)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또 기인의 역 부담이 무거운 곳[苦役處]과 가벼운 곳[歇處]을 번갈아 입역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시대에 기인은 사재감·선공감에 소속되어 서울의 각 관청이나 왕실 전궁에 땔감 연료를 공급하였다. 각 지역의 향리 중에서 번갈아 입역하는 기인의 전체 수는 1416년(태종 16)에는 490명이었다. 기인의 선발은 지방 각 관의 향리 수를 기준으로 하였다.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은 기인을 경역리로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는 기인의 도별 배정, 소속 관청, 납부 물품, 대립가가 규정되어 있다. 이로써 기인의 공역이 땔나무와 싸리나무홰를 납품하는 역으로 정착되었다.

대동법 실시 후 기인역을 대동(大同)에 흡수하여 선혜청의 각 청에서 공가를 지급하였다. 이는 『속대전』 「공전」 경역리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대동법을 창설한 뒤에는 향리입역제를 폐지하고, 경인(京人)이 대가를 미리 받아 기인공물을 담당하고, 그 사람을 기인이라 칭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동법 실시 후 기인은 향리의 신역으로 동원되었던 조선전기의 기인과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경역리조를 비교해 보면, 조선전기 경역리로서의 기인에서 조선후기 공인으로서의 기인으로 성격이 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다른 공인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이후 기인의 공폐(貢弊) 역시 자주 논의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기인이 납부하는 땔나무와 숯의 양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가징(加徵)·늑징(勒徵) 등의 방법으로 기인을 수탈하는 폐단을 막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공폐(貢弊)』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성호사설(星湖僿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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