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대성(句陳大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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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진대성 |
한글표제 | 구진대성 |
한자표제 | 句陳大星 |
상위어 | 별자리/천문(天文) |
동의어 | 북극성(polaris) |
관련어 | 구진육성좌(句陳六星座),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천추성(天樞星) |
분야 | 문화/과학/천문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일권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진대성(句陳大星) |
구진6성좌 중 가장 밝은 별로, 현재 북극성(polaris)에 해당하는 동양식 별자리 이름.
개설
구진6성(句陳六星) 중 가장 밝은 별을 구진대성(α UMi, 1.9~2.1등성, 변광성)이라 하며, 현재의 북극성을 지칭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형태가 갈고랑이 모양으로 굽어진 데서 붙여졌고, 구진 1번, 2번, 3번, 4번 별은 서양의 작은곰자리 일부에 해당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 천문서인 『천문류초』에서 구진6성은 천제가 거처하는 궁궐로 묘사되었고, 그중 가장 밝은 구진대성은 천제의 원비(元妃)이자 여주(女主) 별자리로 간주하였다. 이 같은 생각은 이미 전한(前漢) 초 『사기』「천관서」에서부터 시작된 관점인데, 구진 제1성이 정비(正妃)라면 그다음 구진 제2, 제3, 제4성은 후궁(後宮) 별자리로 보았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진서』「천문지」는 구진대성을 천황대제(天皇大帝)의 정비이며 대제가 항상 머무는 거처로 설명하였다. 이런 생각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진 것임을 『천문류초』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세차운동(歲差運動)에 따라 한나라 때 북극성이던 제성(帝星)이 북극점에서 멀어지고, 당나라 무렵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북극점에 가까워져 새로운 북극성으로 관측되었다. 그러다 13세기 원나라 무렵에 이르면 5.3등성으로 어두운 천추성보다 더욱 밝은 2.1등성의 구진대성이 북극점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북극성을 지칭하는 별자리 이름으로 천추성과 구진대성이 대립하는 형국을 이룬다. 『명사』「천문지」에 구진대성 이름이 등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변천
『세종실록』과 『국조역상고』의 기록을 살피면, 1432년(세종 14) 4월 15일에 주야측후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완성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지은 승지김돈(金墩)의 서명(序銘)에 따르면, 적도면에 평행한 3개의 고리(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와 이에 수직되는 방향으로 2마리의 작은 용(길이 1척)이 떠받치는 정극환(定極環)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정극환은 글자 그대로 북극을 정하는 고리이며, 당시 측정한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춘 것이다. 이때 정극환은 2개 내외 고리로 구성되며, 바깥 외환은 너비 3푼에 지름 2촌 3푼이고, 안쪽 내환은 너비 4리에 지름 1촌 4푼 반 크기이다. 이들 내환과 외환 사이에는 구진대성이 나타나고, 내환 안에는 천추성이 나타나도록 하였으니, 남북 적도(赤道)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정극환의 내환 중심에 천추성을 맞추고 있다는 말은 세종조 당시의 북극성을 천추성으로 보았다는 의미이며, 구진대성은 북극점에서 외환 범위 내로 떨어져 있는 별을 말한다. 그런데 1500년 기준으로 거극도가 천추성은 3.86°이고, 구진대성은 3.21°로 이미 역전되므로, 세종대는 더욱 밝아서 관측하기에 용이한 구진대성을 새로운 북극성으로 주목하였어야 할 시기이지만, 세종대 천문역법은 모두 원나라의 수시력 관측치와 이론에 기반하고 있던 까닭에 일성정시의에 그 같은 새로운 천체 변화를 반영하지는 못했다.
이어지는 김돈의 서문에 따르면 주천환(周天環)을 사용할 때 관측 막대기인 계형(界衡)으로 북극 제2성의 위치를 관측하여 바퀴의 가장자리에 표시하고서 동짓날 자정의 주천도 초도(初度)를 맞춘다 하였는데, 이는 북극 제2성이 북극에서 가깝고 가장 붉고 밝아 쉽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 언급된 북극 제2성은 북극5성좌 중 제2제성(帝星)을 일컫는 것인데, 제성은 2등성으로 상당히 밝은 별(β UMi, 2.0~2.3 등성)이다. 그렇지만, 북극 제2제성은 거극도가 1500년 기준으로 13.81°여서 세종대 당시 북극점에서 이미 매우 멀어진 별이어서 이를 기준으로 주천도 초도를 맞추기에는 편차가 상당히 심해진다. 제성 대신에 그와 밝기가 비슷한 구진대성으로 관측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구진대성은 이후로도 점점 더 북극점에 가까워져 서기 2102년에 0.46°로 최근접한다.
이와 같이 세종조에 낮과 밤의 시각을 두루 측정하는 의기로 일성정시의를 제작하면서 북극점에 가까운 천추성과 구진대성을 관측하여 시간 측정의 기준점으로 삼고자 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일성정시의는 당시 4벌 제작하여, 하나는 내정(內庭)에, 하나는 서운관에, 나머지 둘은 함경도와 평안도절제사 감영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천체 관측에 바탕한 시각의 정확성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천문류초(天文類秒)』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국역 고려사지』, 경인문화사, 2011.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陳遵嬀, 『中國天文學史』上·中·下, 上海人民出版社,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