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백복왕호사(關白復王號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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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막부의 6대 장군 덕천가선 때에 외교상 국서에 사용되던 장군 칭호인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을 신정백석의 주장에 따라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고친 사건.

개설

유천사건[柳川一件] 이후 막부는 조선 교섭에 대한 체제 확립을 꾀하고, 그해에 장군의 호칭을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으로 함으로써, 1636년(인조 14) 통신사부터는 ‘일본국대군’의 호칭이 규정되어 조선 왕의 국서(國書)에도 ‘일본국대군’이라는 대군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6대 장군 덕천가선(德川家宣) 때에 이르면 막부의 중신인 신정백석(新井白石)의 주도로 장군의 호칭이 ‘일본국대군’ 호에서 일시적으로 ‘일본국왕’으로 변경되었다.

역사적 배경

강호시대 일본이 외국에 대하여 사용한 막부장군의 칭호는 대군(大君)이었다. 이 칭호가 외교문서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3대 장군 덕천가광(德川家光)의 때인 1636년의 일이었다.

1631년 대마번주의 가신이었던 유천조흥(柳川調興)과 대마도주 종의성(宗義成) 간의 알력으로 인하여 발생한 유천사건으로 대마번의 종씨(宗氏, [소씨])가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의 국교 재개 및 양국의 교섭을 지속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에 보낸 장군의 국서를 개찬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대마번이 독단적으로 조선 왕 앞으로 보낸 장군의국서에 ‘일본국 원가광(日本國源家光)’ 대신에 ‘일본국왕(日本國王)’ 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천사건은 1635년 장군 덕천가광의 판결로 유천조흥과 번주인 종의성에게 각각 유죄와 무죄가 선고되면서 종결되었다.

유천사건 이후 막부는 조선 교섭 체제의 확립을 꾀하였고, 그해에 덕천장군의 호칭을 ‘일본국대군’으로 할 것을 여러 대명(大名)들이 모인 자리에서 덕천가광이 직접 시달하였다. 그리고 대마번 사신 당방좌위문(唐坊左衛門)을 통하여 조선에 요청하고, 또 양국 간의 교섭문서를 감독하기 위하여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를 개시함으로써 대마번에 위임한 조일관계를 직접 관리·감독하게 되었다. 이렇듯 조일외교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1636년(인조 14) 통신사부터는 ‘일본국대군’의 호칭이 규정되어 조선 왕의 국서에도 ‘일본국대군’이라는 대군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발단

1709년 5대 장군 덕천강길(德川綱吉)이 죽자 덕천가선이 6대 장군이 되었다. 덕천가선은 덕천강길의 정치를 보좌해 왔던 유택길보(柳澤吉保)를 배제하고 간부전방(間部詮房)과 유학자 신정백석을 신임하여 정치 쇄신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막부의 전례와 의식을 정비하여 장군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그중에는 1711년 조선의 통신사에 대한 외교문서와 접대 의례의 변경도 들어 있었다.

1711년 통신사는 6대 장군 덕천가선의 장군직 승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된 사절이었다. 당시까지 조선의 국서에는 장군에 대해서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으로 써왔는데, 신정백석이 이것을 ‘일본국왕’으로 변경하여 쓸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왕의 국서에 장군을 칭하는 호칭으로 ‘일본국대군’의 사용은 일시 중지되고 ‘일본국왕’으로 변경되었다. 중국에서 대군은 천자(天子)를 칭하고, 조선에서는 왕의 적자(嫡子)를 부르는 칭호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바로 이것이 관백복왕호사이다.

경과

1711년 5월 15일 정사조택억(趙泰億) 이하 500여 명의 신묘 통신사 일행은 흥정전(興政殿)에서 숙종을 배알한 후 왕성을 출발하였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건너가기 전 부산에서 순풍을 기다리고 있을 때 대마번주 종의방(宗義方)으로부터 ‘일본국왕복호(日本國王復號)’ 문제가 들어 있는 서계가 동래 부사를 통하여 예조에 보고되었다(『숙종실록』 37년 5월 25일). 통신사가 국서를 휴대하고 한양을 이미 출발한 후인 5월 하순에 이루어진 복호(復號)에 관한 통고는 조선 정부에게는 갑작스런 서식개정 요구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왕호의 개정이라는 외교 의례는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대국의 준비나 사정을 참작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통신사의 출발 후에 요청하는 등 국제 의례를 전적으로 무시한 행동이었으므로 처음에는 거부를 표시하였으나 격렬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현실 중시론을 취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의 복호 요구는 우리나라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대명(大名)에게 장군의 권위를 과장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과 일본이 처음에는 일본국왕이라고 하였고, 후에 대군이라고 고쳤기 때문에 조선도 개서해 왔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 다시 왕이라고 칭하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는 것, 일본 장군이 국내에서 왕이라고 개칭한 것을 알면서 국서를 고쳐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으로 논의가 모아졌다(『숙종실록』 37년 5월 27일). 통신사 일행이 개작된 국서를 가지고 부산을 출발한 것은 7월 5일이었다.

신정백석이 국왕 칭호를 주장한 목적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관직 체계를 만들어 천황을 배제하고 명실공히 일본의 지배자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려는 데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8대 장군 덕천길종(德川吉宗)은 조일외교의 틀을 5대 장군 덕천강길 때의 예로 되돌렸다. 덕천길종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에 앞서 대마번과 대마번에 파견된 문위역관 사이에 성립된 통신사강정절목(通信使講定節目)에 의하면 장군의 대호(大號) 및 국서 내외면의 예식은 임술년(1682)의 예에 따르며, 대호는 대군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 1719년(숙종 45) 기해통신사부터는 다시 ‘일본국대군’ 칭호가 다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 민덕기, 『前近代 동아시아 세계의 朝·日관계』, 경인문화사, 2007.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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